[남시욱칼럼]벌써 初心이 흔들리나

  • 입력 2003년 3월 5일 20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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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권의 큰 과오 중 하나는 그의 햇볕정책 비판자들을 무조건 남북대화 거부세력으로 몬 점이다. 재작년 평양에서 열린 8·15 경축대전에서 일어난 일부 남측 참석자들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파문이 인 데 대한 책임을 물어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을 때의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일부의 돌출행동으로 큰 파문을 야기하고 결국 그것이 남북한 화해 협력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구실을 주게 됐다”고 말했다.

대북 비밀송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검제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을 계기로 현재 이와 비슷한 분위기가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 의해 조성되고 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특검제가 남북관계를 훼손한다고 주장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압박하고 있다. 언론플레이와 여론몰이도 노골적으로 벌이고 있다.

▼특검거부는 선거공약 위반▼

노 대통령이 지난번 대선에서 당선된 데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그의 우직스러울 정도의 원칙주의가 한몫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당장에는 손해를 보더라도 원리원칙에 충실한 정치인이라고 스스로 강조했었다. 그가 대선 때와 당선 직후까지 대북 비밀송금 사건의 철저한 진상조사를 공언했을 때 올바른 남북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남북관계가 정상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오겠구나 하고 기대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과연 김 전 대통령에게 불똥이 미칠 수 있는 이 사건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 들어 이 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했던 당초의 태도를 바꾸더니 국회가 특검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번에는 이를 신속하게 공포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국회에서 여야가 재협상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특검 법안에 대한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그의 선거공약 위반이자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펴겠다는 취임사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대북 비밀송금의 조사가 남북대화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국가이익을 해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일방적 주장이다. 남북대화는 이미 70년대부터 단속적으로 계속 되어왔고, 앞으로도 궁극적 통일이 이룩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 대북 정책의 추진과정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은 과감하게 시정되어야 한다. 노 대통령은 취임식 때 대북 정책의 원칙으로서 투명성과 호혜주의, 초당적 협력을 천명했다. 김대중 정권 당시의 불투명성을 그대로 덮어두고는 투명한 대북 정책의 추진은 불가능하다. 남북호혜주의가 지켜지고 있는지도 판단할 수 없다.

지금 민주당은 천연덕스럽게 억지논리를 펴고 있지만 특검 법안의 국회통과는 전혀 하자가 없다. 민주당의 정치개혁 방안 중 하나가 삼권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특정인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 막 출범하는 노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회의 다수결 원칙을 거부권 행사로 무효화하게 함으로써 그를 제왕적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것인가.

▼對北정책 잘못있으면 밝혀야▼

대북 비밀송금 사실은 이미 감사원 감사결과 밝혀졌다. 문제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정확히 얼마를, 어떤 방법으로 송금했느냐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점이다. 거액의 돈이 북한에 간 이상 북한 당국자들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사건을 덮어 버린다면 북한 당국은 환히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 국민만 모르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 돈이 과연 현대의 독점사업 대가인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뒷돈인지를 밝혀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을 돈으로 샀다면 그 진정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특검 법안 수정협상 제의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야당 지도부의 태도와 당권경쟁을 앞둔 야당 내 사정으로 보아 여야간의 타협 가능성은 크지 않다. 노 대통령은 자칫하면 취임 초부터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벌써부터 초심(初心)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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