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가짜 박사女의 Kiss&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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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7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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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실장
황호택 논설실장
사회적 기업 수다공방을 경영하는 전순옥 대표는 신정아 씨의 자전적 에세이 ‘4001’이 나오기 전까지는 신 씨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품었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는 “신 씨가 우리 사회의 관음증(觀淫症)과 상업주의 저널리즘에 희생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4001을 보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가정 파괴와 사회적 매장 행위를 너무 쉽게 내지르고 있다”며 분노를 표시했다. 그의 말마따나 4001에는 인성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는 비수가 곳곳에 번득인다.

가짜 박사학위에 관한 장황한 배경설명과 구차한 논리를 뭉뚱그려 한 줄로 요약하면 ‘예일대가 있는 뉴헤이븐에 상주하지 않고 논문 대필자(代筆者)를 두어 박사학위를 따려다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신 씨는 1981년 버지니아대의 논문을 베낀 학위논문과 가짜 박사학위로 대학 사회와 미술계를 뒤흔들어 놓고서도 ‘학위를 위조했던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박사학위를 따보려고 노력했다’고 둘러댄다.

좀 두꺼운 영어사전을 들춰보면 ‘kiss-and-tell’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직역(直譯)하면 키스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해 소문낸다는 뜻이다. ‘키스 앤드 텔’은 매력 있는 여성이 사회적 명사들에게 접근해 성적 관계를 가진 뒤 배신을 때리고 황색 신문에 폭로하거나 책으로 출판해 수익금을 챙기는 행태를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신 씨는 4001 서문과 책 홍보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근사한 말을 쏟아냈지만 이 책이 전형적인 ‘키스 앤드 텔’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인세 수입 노린 명사 상처내기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신 씨는 변양균(卞良均) 씨를 책에서 똥아저씨라고 부른다. 卞을 똥 변(便)으로 읽어 놀리는 말이다.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낸 변 씨는 신 씨와의 일로 불명예 퇴진했고 수감생활을 했다. 고위공직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처럼 혹독한 죗값을 치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신 씨는 ‘똥아저씨가 대학 다닐 때 꽃뱀에게 걸려 처음으로 여자와 잔 이야기도 불었고, 처음에 나를 꼬시려고 예술에 관심이 있는 척했지만 나를 자빠뜨리고 난 뒤에는 예술의 예자도 꺼내지 않았다’고 빈정거린다. 이것이 5년 동안 ‘아픈 사랑’을 나누었다는 남자에 대한 예의인가. 변 씨와 가족을 두 번 죽이는 짓이다.

이 책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현 동반성장위원장)과 C 기자(현 공직자)가 가장 심하게 난타당했다. 신 씨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 줄소송이 제기되면 책이 얼마나 팔릴지 모르지만 인세(印稅)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내용이 진실에 부합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목적이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지만 4001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집필한 책으로 보기에는 사익(私益) 추구와 보복심리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나는 성곡미술관을 방문해 신 씨에게서 직접 작품 설명을 들으며 전시회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큐레이터는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미술 공부에 미련을 접을 수 없어 전공이 다른 국내 대학을 중퇴했고, 캔자스대를 졸업하고 MBA를 했으며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말했다. 그의 정체가 드러난 후에 돌이켜보니 배우의 연기처럼 거짓말을 천연스럽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들도 거짓말을 가끔 하고 산다. <늦은 저녁/그녀는 어떤 옷을 입을지 망설였지/화장을 하고 긴 금발머리를 빗어 내렸어/그리고 내게 물었지 “나 괜찮아 보여”/나는 대답했네. “그래 오늘 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 에릭 클랩턴이 부른 ‘멋진 오늘밤(wonderful tonight)’의 가사처럼 성장(盛裝)한 아내가 집을 나서며 “나 괜찮아 보여”라고 물을 때 “별로야”라고 대답할 수 있는 간 큰 남편은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가정과 직장의 평화, 그리고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조금씩 거짓말을 하고 산다.

진실한 사죄 없는 자기합리화

그러나 신 씨의 거짓말은 사회적 신뢰를 파괴한 행위다. 그는 가짜 학위로 교수 자리를 얻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획득했다. ‘나는 나를 위로한다’의 저자 이홍식 교수(연세대 의대 정신과)는 “책에 나온 인물들의 존엄과 가치를 대중 앞에서 망가뜨리고 그 사람들의 가족과 자녀들에게 지울 수 없는 수치심을 주었다”고 말했다. 자기애(自己愛)의 집착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기합리화가 심해 분노나 섭섭함을 자기중심적 사고체계 속에서 극단적으로 표출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신 씨는 책 서문에 “오랜 세월, 천천히, 나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고생하신 많은 분들을 위해 가슴 깊이 사죄드리며 살아갈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런 식의 ‘키스 앤드 텔’은 진정으로 사죄하는 마음과 한참 거리가 멀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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