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이래서 민심 떠난다

  • 입력 2003년 6월 4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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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100일의 국정 성과 홍보이야기는 당초 꺼내지 않았으면 제일 좋았다. 그보다는 ‘아직 시동이 제대로 걸리지 않아 큰 성과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준비 안된 정부라는 비판은 받겠지만 솔직하다는 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3개월여 동안 공직사회, 교단, 노사현장의 국정 혼선과 서울 광화문거리의 사회적 갈등은 벌겋게 알몸을 드러냈는데도 ‘탈(脫)권위주의 성과는 이루지 않았는가’ 하는 식이니 안면이 꽤나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탈권위’란 것도 언제 되살아날지,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는 것인데, 삼계탕집 모임처럼 스타일 좀 바꿨다 해서 그 뿌리가 뽑혔다는 것인가. 게다가 공개회견이나 토론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대통령의 성난 표정이나 목소리를 듣자면 ‘탈권위’를 장담하기엔 아직 이르다. 무엇보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적 정치소비자로서의 기대감이란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런 기대감의 상실이 정권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40% 수준의 낮은 평가로 나타난 것 아닌가.

▼정권 무기력, 민심 피곤 ▼

정권 최대 패착은 국민을 대단히 피곤하게 만든 것이다. 정권 초의 역동감은 볼 수 없고 무력증이 미만했으며, 새 기풍의 진작이 아니라 소모적 논란이 이어졌고, 정권의 모호한 이념적 정향성으로 부문별 분열만 가속시켰으니 어느 한구석에선들 편안함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인수위원회가 4대 국정원리와 12대 국정과제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다 살림살이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으니 체감 피곤증은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의 언행은 국민을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민감한 부문을 언급할 때마다 측근에선 ‘원론적인 설명’이라는 주석을 달고 다녔으니 아무리 역설적인 표현이고 반어법의 사용이라 하더라도 가뜩이나 피곤한 민심을 더 짜증나게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지금 나라사정은 정권 초가 아니라 아직도 대통령선거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계속되는 지루한 해명과 공방을 설명할 길이 없다. 토론을 앞세운 참여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정권이 보여준 것은 민주주의로 포장한 무기력뿐이다. 특히 측근들의 땅 의혹이 불거지자 당사자는 몸을 사린 채 청와대가 대신 나서 해명하는 지경이 됐으니 이것이 과연 정상인가. 지금 보여주는 것은 결코 제대로 된 정권의 출발 모습이 아니다.

▼기대감 상실의 후유증 ▼

정권 무력증이 초래한 것이 국민적 기대감의 상실이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이익집단간의 충돌에 끌려다니느라 민심을 다잡고 감동을 주면서 기대를 걸게 할 만한 아무것도 내놓지 못했다. 희망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과연 국정운영능력이 있는 정권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정권은 끊임없이 ‘개혁’과 ‘통합’을 외쳐왔다. 두 가지 모두 단시일에 이룩될 명제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개혁의 청사진이라도 그려냈어야 했고, 통합의 머릿돌이라도 제대로 놓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 기대감이라도 생긴다면 피곤은 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개혁은 사회주류를 교체하겠다는 주술에 휘말려 분야별 갈등만 키웠고, 통합은 ‘코드’니 뭐니 하면서 구성원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안정’을 외치면서 정작 국민을 불안케 한 것은 정권 실세들의 언동이 아니었는가. ‘참여’를 내세우지만 대선 때 지지자 중 상당수가 등을 돌리면서 국정 100일의 평가가 역대 정권 중 최하위로 떨어진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국 말만 번드르르했지 속은 텅 빈 ‘구호공화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정권에 대한 신뢰는 약속에 대한 실천에 비례한다. 실천이 힘들면 말이라도 줄였어야 했다. 여기서 정권은 신뢰를 쌓는 데 실패했다. 한번 등 돌린 민심은 쉽게 되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혼돈 100일의 근본적 이유는 빠른 시간에 단 한번 시도로 쉽게 정권을 잡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정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했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경박한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국정 설계의 결정적 시간을 워크숍과 시험가동으로 보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언제까지 ‘준비 중’이란 말인가. 이렇게 해선 내년 총선 민심 못 잡는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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