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오코노기 마사오]김정은의 생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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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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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많은 전문가가 후계자인 김정은이 직면할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확실히 만 30세도 안 된 청년이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고, 식량도 부족한 북한을 끌고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20년 전인 1991년 12월, 49세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했을 때 직면한 사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당시 북한은 몇 가지 패배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먼저 한국과의 체제 경쟁에서의 패배다. 사회주의 경제가 파탄 나 경제 계획조차 세울 수 없을 때 한국은 중화학 공업화를 달성했고 정치적 민주화까지 실현했다. 북한은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여객기를 폭파했고, 올림픽 개최 다음 해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열기도 했지만 거기까지가 국력의 한계였다.

두 번째는 북한 후원군인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였다. 김일성 부자는 헝가리를 필두로 동유럽 제국이 차례차례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나아가 베를린 장벽 붕괴와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 처형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과 한국의 국교 수립,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소련 연방 붕괴 등이 이어졌다.

세 번째로 가장 긴밀한 동맹국이 됐던 중국도 톈안먼(天安門) 사건 이후 북한을 배신했다.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덩샤오핑(鄧小平)은 1992년 초에 시장경제를 대폭 도입하기로 하고 그해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했다. 그해 8월에는 한국과의 국교 수립도 이뤄졌다.

더구나 김일성 사후 북한은 1995년과 1996년 대홍수, 1997년에는 가뭄 등 3년 연속 자연재해를 당했다. 이 때문에 심각한 식량위기가 발생해 국제적인 식량지원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명의 국민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한 것은 ‘3년상(喪)’이 끝난 후인 1997년 10월의 일이었다.

요약하면 김정일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때부터 부친 사후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하기까지 또는 1998년 9월에 헌법을 개정해 국가 최고직책이 된 국방위원장에 취임하기까지 북한은 심각한 체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국민에게 ‘고난의 행군’을 강조하면서 선군(先軍)정치의 깃발 아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매진했다. 이런 극단적인 군사체제에 매달려 북한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김정일의 시대는 끝났다.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아버지와 같은 ‘폭군’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왕조시대의 어린 왕세자 즉위 때와 비슷하게 당분간 북한은 김정은을 정점으로 하는 ‘유일 지도체제’를 형성하면서 고모부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 후견인이 되고, 이영호 인민군 총참모장 등이 지탱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취할 것이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하는 신체제는 김정일의 유훈을 받들면서 중국의 옹호를 배경으로 미국과의 대결을 계속 회피하며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시간을 벌게 될 것이다.

김정일이 경험한 고난과 비교하면 최근 수년간 진전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수차례의 김정일 방중으로 회복된 중국과의 긴밀한 우호관계 등은 김정은에게 주어진 혜택이다. 김정은이 아버지가 남긴 군사적 유산을 쉽게 버리진 않겠지만 이를 토대로 군사 중시의 국가 운영을 경제 중시로 전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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