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송혜진]판소리와 쿠바 선율이 만났을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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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송혜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내 달콤한 사랑이여 나를 더욱 사랑해주오/너무도 사랑스러운 당신 나 그댈 영원히 사랑하리오∼.” 쿠바 국립오페라단 소속 남녀 가수가 순진한 사랑의 고백을 애틋한 선율에 얹어 부른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불러 세계적으로 더 유명해진 쿠바의 볼레로 ‘키에레메 무초’의 원조(元祖) 맛을 보는 순간이다. 즐거움이 쏠쏠하다. 추위가 유난스러웠던 지난해 말, 서울 삼성동의 올림푸스홀. 쿠바에서 온 몇몇 뮤지션의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 음악에너지가 청중을 단번에 무장 해제시키며 색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음악과 음악,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의 경계들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사람들끼리 즐거운 마음과 웃음 머금은 눈길을 주고받던 마술 같은 이 음악시간은 한-쿠바의 문화교류 사업으로 기획된 ‘쿠바 노마딕 프로젝트-여름에서 겨울로’였다. 다소 길고 생소한 이 공연은 양국 음악가들이 모여 서로 어울려 보는 ‘특별한 음악 만남’의 자리였다.

비수교 국가와의 ‘외교 음악회’

2부로 진행된 이날 공연 1부에서는 소프라노와 바리톤 두 성악가가 색다르게 편곡한 한국 측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연주곡에 맞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와 쿠바의 대표적인 노래를 불렀다. 낯선 청중이 바로 코앞에 앉은 작은 공연장이라 가수들은 잔뜩 긴장한 눈치였지만 ‘과장’도 ‘포장’도 없이 수수하게 부르는 그들의 노래에 객석은 환호했다. 이어 30대 안팎의 4인조 재즈밴드 ‘아이레드 콩시에르토 그룹’이 등장했다. 피아노와 드럼, 클라리넷, 더블베이스를 주 전공으로 하면서 동시에 색소폰 타악기 노래를 겸한 쿠바 뮤지션들은 정말 다채로운 리듬과 선율을 선보였다. ‘자유분방’ ‘자유자재’ ‘종횡무진’으로 음악 속을 누비는 이들의 모습은 카리브 해의 햇살처럼 밝은 기운을 퍼뜨렸고, 객석에 함께한 모든 청중은 쿠바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흔쾌하고도 행복한 웃음을 나눌 수 있었다.

2부 순서는 더 흥미진진했다. 재즈를 연주하는 쿠바의 4인조 그룹이 허윤정 등의 한국 전통 음악계의 대표주자들과 어울려 만들어낸 교감의 무대였다. 거문고 해금 타악기 노래가 어울린 산조, 판소리, 정선아리랑 가락이 쿠바의 자장가, 민요와 만났다. ‘탐색’과 ‘대화’, ‘공감’의 단계를 거쳐 서서히 절정으로 치닫는 절묘한 악흥(樂興)은 아름다운 소통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절정의 순간이 지나고 판소리 부르는 이자람과 타악주자 둘이 대학생 같은 차림으로 먼저 무대에 나와 자리를 잡았다. 무대 의상치고는 좀 ‘소탈하다’ 싶었는데 뒤이어 등장하는 쿠바 뮤지션의 옷차림에 그만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색색의 두루마기를 걸치고 천진한 악동 표정으로 입장한 이들은 판소리 ‘심청가’를 함께했다. 심청이 죽음의 바다로 향하며 부르는 느리고 슬픈 대목에서는 구슬픈 쿠바의 선율로 응대하고, 뺑덕어미의 악행을 읊조리는 빠른 대목에서는 아예 “밥 잘 먹고 떡 잘 먹고 고기 잘 먹고 술 잘 먹고/양식 주고 술 사먹기∼.” 우리말로 제창하며 너나없이 흔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한-쿠바 음악교류 프로젝트’는 사실 비수교국과 음악으로 친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외교통상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선한 ‘외교음악회’로 자칫 관 주도의 ‘비호감 공연’으로 분류될 우려가 높았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 성공의 비밀은 ‘서로에게 다가서기’에 있었다고 본다. 외교 성격을 띤 지금까지의 공연에서는 우리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것을 우리가 봐주는 일방적인 계획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쿠바 노마딕’의 핵심은 서로에게 다가서면서 알아가는 ‘쌍방향 소통’이었다. ‘내’가 소리를 내면 ‘그대’가 듣고, ‘그대’가 소리를 내면 ‘내’가 들어 서로의 ‘울림’을 낳고, 내가 거기에 소리를 덧대어 아름다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힘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특별한 어울림’

여름의 나라 쿠바에서 한겨울에 서울로 온 뮤지션들이 긴장을 풀고 환한 웃음으로 풀어놓은 그들의 음악언어가 우리의 젊은 음악가들과 만났을 때 단순히 선율과 리듬만 오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청중 또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음악의 즐거움에 취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각종 조약(條約)이나 정치, 이해득실의 복잡다단한 ‘관계 만들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복한 감성과 예술적 교감을 충분히 맛보았다고 생각된다.

다른 문화와의 관계가 더없이 소중해지는 시대, 서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대상과 친해지는 방법을 고민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이 같은 ‘예술로(路)’를 확장하라고 권하고 싶다. 쿠바 노마딕 같은 기획이 더 자주, 더 세련된 방법으로 지속돼 우리나라가 21세기 세계 문화 속에서 조용한 리더로 성장할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송혜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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