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문태준]가슴에 시 한 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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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낭송가들의 모임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모임에 와서 시 한 편을 낭독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분주한 집안일로부터 잠시 손놓고 온 주부, 학생, 직장인이 함께한다고 했다. 내게 할당된 시간은 5분 남짓. 작은 무대에 누구든지 오를 수 있지만 한 편의 시를 낭독하는 시간은 나름대로 정해 놓았다고 했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닥아서다’라고 노래한 조지훈의 시 ‘낙화’가 생각나는 봄날에 한 편의 시를 함께 듣고 즐길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뛰었다.

서점, 병원, 함상에서도 낭독회

낭독회 출연 요청을 요즘 부쩍 많이 받는다. 방송사의 낭독 프로그램 출연 요청도 받았는데 매주 한 차례 방송되는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낭독 300회를 맞았다. 방송사 라디오 프로그램은 시인의 육성 시 낭독을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는데, 보는 데 어려움이 있는 분들을 위해 보급한다는 뜻이 좋아 선뜻 동참했다. 도서관에서 열리는 낭독회는 물론이고 장기 입원 환자의 병동에 가서도 시를 낭독했다.

내가 다녀온 낭독회 가운데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곳이 서너 곳 있다. 한 곳은 ‘공간시낭독회’인데 1979년 4월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열린다. 작고한 구상 시인, 박희진 시인, 성찬경 시인이 최초 멤버이다. 또 한 곳은 시를 좋아하는 분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의 회원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다가 석 달에 한 번 카페에 모여 시집을 서로 선물하고 시를 낭독하고 있었다.

어느 회원이 특히 기억에 또렷한데 여성으로 연세가 꽤 많았고 교통사고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나의 시를 특별히 낭독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력에 장애가 생기는 바람에 시를 암송하느라 꼬박 열흘이 걸렸다고 했다. 성공적으로 시를 낭독한 후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물론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고등학교에서 열린 낭독회는 더욱 고무적이었다. 학생들은 시를 강렬하고 반복적인 랩뮤직으로 만들어 부르고 연주하거나 마임으로 극화했는데 젊은 창작의 에너지는 가히 놀랄 만했다.

낭독회가 이곳저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는 일만큼 기쁜 일도 드물다. 수형자를 위해 교도소에서 낭독회가 열렸다거나 함정에서 생활하는 해군 장병을 위해 낭독회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자연휴양림에서 ‘생태 시 낭독회’를 열 계획이라는데 말만 들어도 선선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해지는 기분이다. 시인이나 작가가 신작 시집이나 소설집 출간에 맞춰 독자를 위한 낭독회를 여는 일도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외국 작가들이 신작 출간을 기념해 방한하면 낭독회를 갖는 일 또한 비일비재해졌다.

고단한 삶, 읊조림의 여유

낭독 자체도 큰 즐거움이지만 한 편의 시나 소설의 한 대목을 암송하는 일은 더 멋스러운 일이다. 낭독회에 참여해 보면 외워 읊는 사람이 많다. 어느 분은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외웠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살아서 그리웠던 사람,/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주었다’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같은 시를 외우는 분은 참석자로부터 더 많은 박수갈채를 받는다.

어느 대학의 국문과에서는 한 학기에 시 열 편을 외우게 하는 시험을 치른다고 들었다. 마음의 안쪽에 시를 식목하는 이런 방침은 참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가 청춘의 옥토에 뿌리 내리고 자라난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시인 가운데서도 시를 잘 암송하는 분이 더러 있다. 별세한 시인 김관식은 시를 천 수 외웠다고 한다. 원로인 신경림 시인도 많은 시를 암송하는 분으로 알려졌다. 나는 그가 라디게의 시 ‘전쟁’이나 박용래, 박재삼의 시를 줄줄 외우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이라고 했고 “시는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라고 했다. 일이 바쁘고 세상의 인심은 강퍅하지만 마음속에 시 한 편 감추고 사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곧 있을 낭독회에서 이형기 시인이 생전에 쓴 ‘강가에서’라는 시를 외워 읊을 생각이다. ‘물을 따라/자꾸 흐를라치면//네가 사는 바닷말에/이르리라고//풀잎 따서/작은 그리움 하나//편지하듯 이렇게/띄워본다’ 벌써 낭독회가 손꼽아 기다려진다. 나의 가슴에서는 환한 고동소리가 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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