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정윤수]인문성의 가치 웅변하는 숭례문

  • 입력 2008년 2월 16일 02시 57분


인문학이 위기라고들 한다. 이제는 지식문화계를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로까지 확산된 화두이다. 몇몇 대학에서는 인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국문과나 철학과를 폐과하거나 ‘문화콘텐츠학’ 등의 날렵한 간판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 보건대 혹시 제도로서의 인문학, 그러니까 대학이라는 교육 제도를 지탱해 나가는 관점에서는 위기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인문성’ 그 자체가 위기일까, 의심스럽다. 과연 우리 사회가 인문성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오로지 정글의 법칙만 강요되는 물신적 이기주의의 생생한 격전장이 되고 말았는가.

필자의 이 의심은 현실적 근거를 갖고 있다. 나는 문화단체 ‘풀로 엮은 집’의 일을 4년째 보고 있다. 문학 철학 미학 예술 일반에 걸쳐 다양한 강좌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졸업장 자격증 수료증 등 그 어떤 제도적 증명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벌써 4000명가량이 용도폐기됐다는 바로 그 인문학 공부를 위해 다녀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진 연구자를 중심으로 한 ‘수유연구실’, 상아탑을 박차고 나온 학자들의 ‘철학 아카데미’, 학술 운동의 새 진지인 ‘다중문화공간 WAB’, 문학과지성사가 든든하게 받쳐 주는 ‘문지문화원 사이’ 등이 밝힌 ‘인문의 등불’은 이 대도시의 현란한 네온사인 틈 속에서도 맹렬하게 빛나고 있다. 성공회에서 주관하는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도 소중한 씨앗이다. 그런가 하면 부산의 ‘인디고서원’은 놀랍게도 인문에 대한 향학열에 불타는 청소년들의 눈빛 때문에 달리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이러한 인문적 열기를 대략이나마 수치로 환산하면, 물신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 대한민국에 얼추 1만여 명의 학생이 민간 자율 영역의 ‘인문대학’을 다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인문성 그 자체의 위기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인문성, 혹은 인문학이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실존적 화두를 해명하는 작업일진대, 아무리 세상이 환금성만을 유일가치로 떠받든다 해도, 바로 그와 같은 물신적 억압 때문에라도,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인문적인 성찰은 오히려 증대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생생한 증거로 처참하게 불에 탄 숭례문을 꼽고 싶다. 할리우드의 그 어떤 감독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이를 지켜본 모든 시민의 가슴은 황망하게 무너졌으며 서울의 밤하늘은 장탄식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비참하지만, 놀라운 광경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문화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한숨과 탄식으로 내비친 것이다. 비록 경쟁 일변도의 양상 때문에 더러 각박한 세태가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직 이 대한민국이 ‘경제 동물’로 전락한 것은 아니다.

불타 버린 숭례문 앞에서 시민들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 때문에 그저 남대문으로 알고 그 곁을 지나다녔지만, 화마에 휩싸여 사라져 가는 숭례문을 보면서, 시민들은 인근의 수십 층짜리 빌딩 사이에서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진경을 보여 줬던 숭례문의 웅자가 바로 우리 삶의 근간이자 목표였음을 뼈저리게 통한하면서, 바로 그와 같은 위엄 있는 삶의 회복을 눈물로써 확인했던 것이다.

사람은 결코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 우애와 위엄이 드리워진 삶, 인간적 자존을 포기하지 않는 인문적 삶에 대하여 불타 버린 숭례문은 의연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인문적 삶의 정위치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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