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건표]디자인, ‘문화 눈높이’에 맞추자

  • 입력 2007년 9월 22일 02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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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디자인 기획자이자 교육자인 제이 더블린 교수는 “제품은 냉동된 정보”라는 말을 남겼다. ‘제품은 당대의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가치를 나타내는 기호’임을 뜻한다. 따라서 제품 디자인에는 기능과 모양 외에 어떤 시대적 가치를 담아 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다.

디자인을 통해 창조되는 인공물은 그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 간다. 우리는 고분 벽화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를 감상한다. 타임캡슐에 지금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공물을 집어넣는 것은 미래의 후손에게 우리가 이러이러한 문화를 가졌노라고 전달하기 위함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종종 “우리는 제품을 디자인하지만, 제품은 곧 역으로 사용자의 행위와 문화를 디자인한다”고 말한다.

최근 디자인 개념의 확대와 시장의 글로벌화로 디자이너들도 ‘문화를 반영한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누구이고, 이를 어떻게 디자인에 반영할 것인가? 쉽지 않은 과제다. 1970년대까지 외국에서 부지런히 제품을 수입해 단순히 이것의 모양을 차별화하는 데 열중했던 우리의 디자인이 세계 시장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조금 세련되게 다듬으면 유럽 디자인 같고, 깜찍하게 만들면 일본 제품과 비슷하고…. 낯선 문화권에 수출하기 위한 제품 디자인의 어려움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지금의 ‘문화적 디자인’이라는 것이 어느 특정 문화에 어울리는 전형적 형태를 찾아내 이에 맞는 색채 등을 적용하는 표피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독일에 수출할 제품은 매우 절제된 조형에 화려하지 않은 색채를, 미국에 수출할 제품은 조금 과장된 형태에 눈에 확 드러나는 색채를 적용한다. 전통 유물의 형태를 현대의 제품에 그대로 덧씌우는 것이 ‘한국적 디자인’인 양 착각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제주도에 가면 볼 수 있는, 돌하르방 모습을 본뜬 공중전화 박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문화적 디자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특정한 외형이 아니라 오히려 사고방식의 차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나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오븐의 두 번째 선반을 이용하라’는 냉동 피자 포장 박스의 안내문. 나는 ‘위에서부터 두 번째’ 선반을 찾았다. 그런데 미국인 동료는 ‘아래에서부터 두 번째’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고마운 경험이 됐다. 디자인이란 시각적 차별화를 고려할 뿐 아니라 사용자의 잠재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개념, 감성적 가치관까지 읽어 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독일 수출용 전자레인지를 디자인한 지인에게서도 비슷한 경험을 들었다. 그는 ‘해동’을 뜻하는 아이콘을 눈(雪) 결정에서 녹아내리는 물방울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그런데 적잖은 독일 소비자는 이것을 보고 뜻밖에 ‘치질’을 연상했다고 한다.

한국 기업은 수출용 휴대전화에 각 문화권이 선호하는 색상을 적용하고 사용메뉴를 현지 언어 체계에 맞게 수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한국어로 번역된 외국산 소프트웨어를 쓰면서 많은 불편을 겪는다. ‘이름, 성’의 순서로 성명을 입력하고 ‘월, 일, 연’의 순으로 생년월일을 입력해야 하는 것 등이 그렇다. 이렇게 수입한 제품 디자인에서 느낀 문화적 불편은 그대로 수출할 제품 디자인에서 반영해야 할 가르침이 된다.

문화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단지 ‘다름’이 있을 뿐이다. 제품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 모두 시각과 가치관에 유연한 변화를 보여야 할 때다.

이건표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세계디자인학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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