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명옥]여자의 적(敵)은 여자가 아니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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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한국사립미술관 협회 회장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한국사립미술관 협회 회장
나는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킨 숨은 표의 주인공이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선거 출구조사 결과 남자들 사이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당선인을 49.8% 대 49.1%로 0.7%포인트 근소하게 앞섰지만 여자들 사이에서는 박 당선인이 51.1%로 47.9%에 그친 문 후보를 비교적 큰 차이로 앞섰으니 말이다.

출구조사 결과를 접하는 순간 나는 ‘우리나라 여자들이 성우(聖牛·sacred cow)를 죽이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구나’ 생각했다. 성우란 힌두교에서 신성시되는 소를 말한다.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통념이나 관행, 다시 말해 금기를 뜻한다.

첫 여성대통령 탄생 주역은 여성票

남성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최강 권력을 쟁취한 여성의 등장은 신라시대 진성여왕 이후 1115년 만의 일이다. 실제로 AP통신은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진성여왕 이후 첫 여성 지도자가 되어 ‘역사를 다시 쓰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유교 문화가 보편적인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가 됐다.

한국에서 여풍이 세지고 남성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다고 토로할 정도로 여성들의 기운이 상승 무드를 타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성적 자유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남성을 능가하는 능력을 과시하는 알파걸마저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지배력의 영토, 권력의 영역이다.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권력의 영토를 최초로 정복하기 위해 정치적 야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통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격렬하게 투쟁하고, 마침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박 당선인이 대선후보 경선에 나왔을 때인 5년 전만 해도 시중에는 “여자라서 안 된다” “여자의 적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절대 찍지 않을 것”이란 말이 돌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불과 5년 만에 달라졌으니 괄목할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여자 후보에게 표를 던졌을까. 나는 두 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첫째, 심리적 투사다. 삶의 주인공은 남이 정해 주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성취 욕구가 투표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여성 대통령은 독립적이며 자아가 강한 여성들의 내면에 잠든 지배욕을 자극했다. 남몰래 남성적 꿈을 키워 온 여성들의 권력의지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게 투영된 것이다.

둘째, 보상심리다.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여성들은 아직도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삶을 스스로 양보하고 부모나 가족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삶의 주변인으로 떠돌다가 나이가 들면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가슴앓이를 한다. 하지만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었던 욕망의 민낯, 비좁은 독방에 갇혀 있던 여심을 해방시키고 싶은 갈망이 이번에 표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한국사회에 조용한 혁명 시작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자기 삶을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롤 모델을 거의 찾기 어려운 한국 여성들에게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 롤 모델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바위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

큰바위 얼굴을 닮고 싶어 노력하다가 스스로 큰바위 얼굴이 된 어니스트처럼 누군가는 여성 대통령을 롤 모델로 삼을 것이며, 이제 여성들은 남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가슴속 불씨를 지펴 횃불처럼 타오르게 될 것이다. 남성의 삶을 베끼는 일은 멈추고 말이다. 한국 사회에 조용한 혁명이 시작됐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한국사립미술관 협회 회장
#여성 대통령#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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