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일본 시골에 숨어있으면 못 잡을 줄 알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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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공기총 살인사건’ 해결한 경기경찰청 인터폴 추적수사팀

15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경기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인터폴 추적수사팀 사무실에서 서인석 팀장과 송우상, 김미진 형사(왼쪽부터)가 수사 중 모은 단서를 놓고 회의를 하고 있다. 수사팀은 각자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의논하면서 1990년 일본으로 도피해 사라졌던 범인 추적의 실마리를 찾았다. 안산=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5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경기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인터폴 추적수사팀 사무실에서 서인석 팀장과 송우상, 김미진 형사(왼쪽부터)가 수사 중 모은 단서를 놓고 회의를 하고 있다. 수사팀은 각자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의논하면서 1990년 일본으로 도피해 사라졌던 범인 추적의 실마리를 찾았다. 안산=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형사 3명은 사진 몇 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소소한 일상을 담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어머니는 자매와 함께 벌판을 걷고 있었다. 어머니는 40대 전후, 자매는 예닐곱의 나이로 보였다. 자매는 걷다가 마주친 조랑말을 신기한 듯 바라봤고 흐르는 냇물이 반가운지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무언가 발견한 듯 형사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철부지 자매의 얼굴에서 쫓고 있던 어느 ‘악인(惡人)’의 흔적을 찾았다. 이어 악인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가족사진 옆에 나란히 놓았다.

“애들이 닮았네요.” “쏙 빼닮았다.”

1990년 일본으로 달아난 경기 이천 공기총 살인사건의 주범 김모 씨(56)를 찾을 단서가 포착된 순간이었다. 김 씨는 도피 후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러나 유전자까지 숨길 순 없었다.

‘불명예’를 씻기 위해

해마다 200∼400명의 범죄자가 법의 심판을 피해 해외로 달아난다. 경찰은 늘어나는 해외도피 범죄를 막고 사법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와 도피사범 수사를 위한 공조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2012년에는 해외도피 범죄자를 잡기 위한 인터폴 추적수사팀도 만들었다.

2014년 4월 중순 경기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사무실에서 인터폴 추적수사팀의 회의가 열렸다. 분위기는 비장했다. 이날 서인석 팀장(51·경위)과 송우상(45·경위), 김미진 형사(36·여·경사)는 ‘가장 어려운 숙제’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살인이란 중범죄를 저지르고 일본으로 달아난 김 씨를 검거하기로 한 것이다. 상부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30년 가까이 도피 행각을 이어가고 있는 김 씨를 잡는 것이야말로 추적수사팀 본연의 임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 사람 모두 이견이 없었다. 당시 김 씨는 최장기 해외도피 사범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경찰에게는 불명예였다.

수사팀은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을 찾았다. 타자기로 작성된 옛 수사기록은 오랜 시일이 지난 탓에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한 장 한 장 서류를 펼치자 사건 현장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26년 전 이천에선…

1990년 5월 7일 오후 9시경. 검은색 그랜저 한 대가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의 한 방죽길 아래 공터에 멈춰 섰다. 차량 전조등 덕분에 주위가 환해졌다. 남성 3명이 차량에서 내렸다. 농담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들은 고기를 굽기 위해 불판을 꺼냈다. 마른 체격의 A 씨(49)가 뜨거워진 불판 앞에서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거구의 B 씨(당시 22세)도 불판 앞으로 다가섰다.

이때 김 씨가 몰래 차량 트렁크에서 6연발 공기총을 꺼냈다. 김 씨는 뒤돌아선 B 씨를 향해 공기총 한 발을 쐈다. B 씨가 쓰러지자 김 씨는 바로 옆에 다가가 나머지 5발을 모두 쐈다. 이어 B 씨의 머리를 향해 야구방망이를 마구 휘둘렀다. 잠시 뒤 김 씨와 A 씨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B 씨의 시신을 매장했다. 그리고 현금 150만 원과 시계를 들고 현장을 떠났다.

김 씨와 A 씨는 차량 절도범이다. 사건 발생 전 이들은 훔친 콩코드 차량을 B 씨에게 팔았다. 그러나 폭력조직 행동대원인 B 씨는 잔금 30만 원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차량 절도범으로 신고하겠다고 두 사람을 협박했다. 이에 화가 난 두 사람이 B 씨를 유인해 범행을 저질렀다.

사건 발생 후 김 씨는 일본으로 도피하기로 결심했다. 아는 후배에게 “일본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속이고 여권 신청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후배의 사진 대신 자신의 사진을 붙이는 수법으로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국에 남아있던 A 씨는 그해 검거됐고 유죄가 확정돼 15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수사팀은 여주지청을 나와 사건이 일어난 방죽길 공터로 차를 몰았다. 사건이 일어난 청미천 풍경은 1990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다리가 놓이고 방죽길 포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수사팀은 오히려 자신감을 갖게 됐다. 서 팀장은 “이천 공기총 살인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며 “김 씨가 도피 초기처럼 긴장 속에 살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살아만 있다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방심으로 인한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서 찾은 결정적 단서

‘인터폴’(국제형사기구) 간판을 달았지만 해외도피 사범 수사에는 제약이 많다. 현지 국가에선 사법권이 없는 데다 나라마다 사법공조 체계가 달라 해외에서 적극적인 수사를 펼치기 어렵다. 수사팀은 주로 한국에서 도피범의 행적을 쫓아 단서를 잡는다. 경찰청 인터폴계를 통해 해외 경찰 주재관과 현지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검거한다.

수사팀은 김 씨 주변에 대한 기초조사부터 시작해 통신수사, 금융거래, 출입국기록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추적수사 기법을 활용해 흔적 찾기에 나섰다. 과거에도 몇 차례 재수사에 착수했다가 실패한 사건이라 쉽게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나자 형사들의 마음에 ‘포기’란 단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형사들은 마지막으로 김 씨 가족이 찍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 몇 장을 손에 넣었다. 서 팀장은 “김 씨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알리기 위해 가족사진을 남긴 것 같다.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신상 노출에 대한 경계가 무뎌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진을 단서로 추적한 결과 일본 사이타마(埼玉) 현에 사는 한 남성의 신상정보가 포착됐다. 하지만 남성의 이름과 나이는 김 씨와 달랐다. 경찰은 김 씨의 지문정보를 현지 주재관에게 보내 협조를 구했다. 경찰청 외사국이 나서 일본 경찰청에 공조수사를 요청했다. 일본 경찰은 검거전담팀을 꾸렸다. 전담팀 구성 7일 만인 지난해 3월 24일 불법체류 혐의로 김 씨가 체포됐다. 김 씨는 타인의 개인정보까지 도용해 철저히 신분을 세탁했지만 지문까지 바꿀 순 없었다.

법정에서 계속될 진실 찾기

지금까지 김 씨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귀금속 세공 기술을 배워 취업하고 일본인 여성을 만나 새로운 가정까지 꾸린 뒤 생활하던 중 검거됐다. 지난해 12월 그는 한국으로 송환됐다. 일본에서 불법체류 혐의로 재판을 받는 동안 일본 가족은 “김 씨와 함께 살게 해달라”며 눈물로 간청했다고 한다. 송환 이후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자수할 의사가 있었지만 일본에 아내와 아이가 생기고 한국에선 경찰이 쫓고 있어 귀국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특별히 고생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가족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했다”고 전했다.

결국 김 씨가 처벌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하면서 한국과 일본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 셈이다. 수사팀은 영구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을 해결한 보람만큼 안타까운 마음도 느꼈다.

서 팀장의 이야기다. “범죄자는 대가를 치르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 가족은 무슨 죄입니까. 사진 속 아이들 모습이 떠올라 짠했습니다.”

지난해 12월 18일 검찰은 김 씨를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김 씨의 살인 혐의는 해외도피로 공소시효가 정지된 상태였다. 김 씨는 “공범 A 씨가 B 씨를 살해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24일 수원지법에서 첫 공판준비기일이 열린다. 법원은 공판준비기일을 거쳐 국민참여재판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김 씨는 15년간 복역해 죗값을 치른 A 씨와 진실 공방을 벌이게 됐다.

“지구 끝까지 추적한다”

수사팀은 매일 이런 각오로 일한다. 서 팀장은 “범죄자가 해외로 도망가 떵떵거리고 사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세월이 얼마나 지나든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붙잡는다”고 강조했다. 서 팀장이 이끄는 수사팀은 해마다 범죄자 10∼20명의 소재를 확인한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제 마늘밭 110억 돈다발 사건’의 주범 중 1명도 소재를 파악해 국제 공조수사로 검거했다. 지금도 청부살인범, 미성년자 강간범 등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추적하고 있다.

수사팀은 범인은 해외로 달아나고 피해자 시신이 사라진 사건을 국내 수사만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2013년 2월 충남에서 망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세입자 C 씨(45)는 상가에 입주했다가 가게가 손해를 보자 건물주와 갈등을 빚었다. C 씨는 건물주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다음 해외로 도주했다.

경찰은 현지 경찰과 공조해 C 씨의 유력한 은신처를 추적했지만 이미 도주한 뒤였다. 현지 언론을 통해 공개 수배하고 교민사회의 협조까지 구했지만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수사팀은 전국을 돌며 C 씨의 친구와 지인을 만났다. C 씨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종합해 사람과 모임을 좋아하는 C 씨 성격이라면 분명 국내로 먼저 연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사건 발생 8개월 만에 C 씨는 한국으로 먼저 소식을 보냈다. 철두철미한 C 씨도 고국을 향한 그리움 앞에선 경계를 풀었다.

수사팀은 사건 해결의 공로를 서로에게 돌렸다. 김 형사는 강력범죄통이라 ‘촉’이 뛰어나다. 김 씨 사건에서 사진 속 자매의 얼굴에 가장 먼저 주목한 것도 김 형사였다. 그는 “폐쇄회로(CC)TV를 하도 많이 들여다보니까 영상 속에서 범인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만 보고도 현장에서 마주치면 바로 알아본다”고 말했다. 송 형사는 지능범죄통이다. 통신수사, 금융거래, 출입국기록 등 해외도피 사범이 남긴 기록을 탈탈 털어 흔적을 찾는다. 서 팀장은 함께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고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시한다. 서 팀장은 “가족보다 팀원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최근 종영한 케이블TV 드라마 ‘시그널’에는 현재와 과거를 연결해 장기미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무전기가 나온다. 수사팀 형사들에게도 자신만의 ‘무전기’가 있다. 김 형사는 범죄자의 지인을 꼽았다. 김 형사는 “범인의 과거를 아는 지인을 만나 수사하면 범인의 현재까지 그려볼 수 있다”며 “홀로 도망가면 남은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없으니 자신의 행동에 꼭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송 형사는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로 범인을 잡는다. 송 형사는 “한국인은 혈육을 쉽게 잊지 못하고 고향의 맛과 냄새를 그리워한다. 귀향 본능이 강해 잡힐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서 팀장은 소설가 이문열 씨의 장편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해외도피 사범의 행적을 쫓을 때면 소설 제목을 자주 떠올린다. 제목을 살짝 바꿔 입으로 외우면 수사의 실마리가 풀린다.

“그대 다시는 고국을 떠나지 못하리.”

▼ 190개 인터폴 회원국 공조수사 어디까지 ▼

국내 송환 범죄인 年 74명서 216명으로 늘어



365일, 24시간 경찰청 인터폴계는 해외도피 사범 추적·검거를 위해 해외를 누빈다. 경찰은 해외도피 사범 검거를 위해서 190개 인터폴 회원국과 긴밀한 공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강신명 경찰청장은 주요 해외도피 국가를 방문해 해외도피 사범 검거를 위한 협약을 맺었다. 지난달 중국 베이징 공안부를 방문해 ‘한중 연합 도피사범 집중단속’ 공조 강화를 약속하고, 지난해 11월에는 필리핀 이민청을 찾아 한국인 범죄자를 입국 단계에서 한국으로 추방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경찰 인터폴 추적수사팀의 활약 속에 국내로 강제 송환된 도피사범 수는 2011년 74명에서 지난해 216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검거 기록을 깨기 위해 올해도 계속 노력하고 있다. 올 1월 임모 씨(40)는 700억 원대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다 필리핀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필리핀 입국 단계에서 거부돼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같은 달 2500억 원대 주식 사기를 벌이고 중국으로 밀항한 벤처기업 전 대표 이모 씨(45)는 6년 만에 붙잡혀 강제 송환되기도 했다.

인터폴은 국제범죄의 예방과 진압을 위해 회원국의 국내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범죄 정보를 교환하고 범죄자 체포와 인도에 대해 상호 협력하는 국제기구다. 한국은 1964년 9월 가입했다. 경찰청 인터폴계는 인터폴 수배자 관리와 국제공조 수사 업무도 맡는다. 김병주 인터폴계장은 “매년 해외도피 사범이 증가해 인터폴 추적수사팀의 업무량도 크게 늘었다”며 “그러나 범죄자는 반드시 잡는다는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경기청 인터폴#시그널#인터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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