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인기영합 정책上/저소득 생계비 월 93만원

  • 입력 2000년 12월 20일 18시 58분




《지난해 7월 정부는 대우그룹 워크아웃 결정을 내리면서 경제 논리에 맞지 않는 ‘투자자 보호 대책’을 내놓았다. 대우 채권을 사들여 손해를 본 투신사 투자자들에게 원리금의 80∼100%를 준다고 밝힌 것. 재원은 투신사에 지원한 공적자금이었다.

투신사는 은행 등 예금 기관이 아니라 실적에 따라 배당을 주는 투자기관. 정부도 이 점을 늘 강조해 왔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생기고 투자자들이 들고 일어서자 정부는 높은 금리를 노려 투신에 들어온 투자자에게 국민 세금과 직결되는 공적자금을 ‘동원’해 지원했다.

지금까지 투신에 들어간 총 8조원(2차 금융 구조조정 지원분 포함)을 포함해 150조원에 육박하는 공적자금 중 상당액은 이런 식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 낭비됐다.

정부의 경제 정책에 원칙없는 선심성 성격이 짙은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과거 정부에서도 이런 일들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현정부는 과거보다 포퓰리즘 방식의 정책을 더욱 남용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 논리로 늦춰진 구조조정〓정부가 4·13 총선에서의 표를 의식해 올 상반기에 시작해야 했던 2차 구조조정을 늦춤으로써 공적자금 소요액이 크게 늘어났다는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당초 구조조정 계획에 따르면 이 시기는 2차 구조조정, 특히 워크아웃 기업의 퇴출과 생존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렸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정부는 ‘IMF 졸업론’ 등을 내세워 국민에게 장밋빛 환상을 심어 주었다. 이 때문에 국민의 긴장감이 풀어지고 집단이기주의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남투신 인수에 정치입김▼

▽현대투신의 한남투신 인수 내막〓98년 8월 정부 핵심 당국자는 현대측에 광주 지역의 한남투신을 현대투신이 인수, 고객들에게 원리금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 현대투신은 부실기업인 한남투신 인수로 부실해졌고 결국 미국 AIG 그룹에 넘기는 협상을 진행중이다. 최근 현대가 AIG와의 협상과 관련해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는데는 이런 내막이 있다. 금융계에서 ‘정치 입김이 경제에 개입된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이 사건은 투신사 구조조정에 두고두고 짐이 됐다.

▽충분한 대책없이 나온 코스닥 육성책〓정부는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우리 사회를 휩쓴 ‘코스닥 과열’에 불을 지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마치 벤처만이 우리 경제의 새로운 살 길인 양 인식되는 말들을 쏟아냈다. ‘무늬만 벤처’인 일부 벤처 기업인과 ‘작전 세력’이 짜고 ‘장난’을 친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도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부가 코스닥시장의 ‘작전’ 등을 막는 대책을 내놓은 것은 벤처와 코스닥이 이미 얼어붙기 시작한 9월이었다.

▽원칙없는 노동정책이 부른 파행〓정부가 원칙을 양보하면서 노조에 끌려 다닌 8월의 은행 파업 사태는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대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은행노조는 경영진을 상대로 한 노사 투쟁이 아니라 정부를 상대로 노정 투쟁을 벌였고 협상 상대도 정부였다. 정부쪽 책임자였던 이용근(李容根)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협상 타결 후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등으로부터 “은행 파업을 잘 해결했다”며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금융지주회사를 만들 때 감원 여부는 해당 은행 자율에 맡기겠다”고 약속해 2차 금융 구조조정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은행 파업 대처 방식은 노동계 등 각 경제 주체에 ‘정부 공권력에 도전해도 단결하면 이길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었다.

반면 노동계는 다른 측면에서 정부의 인기 영합정책을 비판한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공적자금을 수십조원 투입했는데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대우자동차 부실 책임자인 김우중전회장 등 경영층에는 책임을 묻지 않은 채 인건비 삭감을 위한 인력 감축만 내세우고 있으니 누가 수긍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농가부채 경감대책 남발▼

▽‘생산’은 사라진 ‘생산적 복지’구호〓정부는 ‘사회적 약자’의 복지에 신경을 쓰면서도 ‘복지 과잉’으로 망한 서구 사회민주주의국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생산적 복지’를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일련의 정책은 ‘생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10월부터 시행되면서 저소득층에 지원되는 4인가족 최저생계비는 93만원. 현행 4인가족 맞벌이부부의 최저임금 84만2980원보다 높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 수석연구원은 “기초생활보장제가 사회 통합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일하지 않고 버는 기초 생활 수급액이 최저임금보다 높아 근로 의욕 저하와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곧 국회에서 통과될 예정인 농어업인 부채경감 특별법을 포함해 현정부 들어 5차례(80년이후 총 15차례)나 이뤄진 농가부채 경감대책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한 전문가는 “농민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알지만 이런 식의 지원이 계속되면 빚을 얻지 않았거나 원리금을 제때에 낸 농민이 빚이 많은 농민보다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고 자연히 농민의 자활의지를 꺾게 된다”고 우려했다.

<권순활·최영해·정용관기자>shkwon@donga.com

▼인기영합 정책 취재에 도움준 분들▼

동아일보는 포퓰리즘 경제정책의 폐해를 취재하기 위해 많은 분들의 고견을 구했습니다.전화인터뷰 및 논문발표 등을 통해 취재를 도와주신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가나다순)

△강신우 템플턴투신운용 상무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

△김태기 단국대 교수

△서병훈 숭실대 교수

△신동천 디케이서키트 대표

△신인석 KDI 연구위원

△주진우 민주노총 사무국장

△예종석 한양대 교수

△이영호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임원혁 KDI 연구위원

△최도성 서울대 교수

△최숙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최영기 노동연구원 부원장

△최운열 서강대 교수

△기타 명단공개를 꺼리는 20여명의 재계 금융계 관계 노동계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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