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남은 얼굴]함승희/삶의 지혜 주신 아버지

  • 입력 1999년 1월 5일 19시 11분


91년 9월29일 새벽2시 서울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함상순씨 보호자 되시는 분.”

간호사의 감정없는 호출에 우리 삼형제는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나 허둥대며 다가섰다.

“한분만 들어오세요.” “큰아범이 들어가렴.”

“예 어머니.”

아버지는 입과 코에 여러 가지의 호스를 끼운채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 애쓰셨다. 아버지 손에 만년필을 쥐어 드렸다.

아버지는 한자씩 어렵게 “아범아, 내 걱정은 말아라”고 쓰셨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은 내가 느낄 수 있는 아버지의 마지막 체온이었다. 나는 나의 나약함을 통렬히 느끼며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는 내가 초임 검사로 서울지검 특수부에 발령받았을 때 정말 대견해 하셨다.

아버지는 내 이름이 신문이나 라디오에 나올 때 마다 전화를 하셨다.

“아범이냐, 또 집에 못들어갔겠구나. 밤잠 안자는데 이골이 났겠다만 이제는 나이도 생각하거라.”

아버지는 아들이 검사 노릇만 제대로 하라는 뜻에서 장남인 내가 집안에서 떠맡아야 할 짐까지 도맡아 지셨다.

“아범, 이번 주말에 바쁜가?” “예, 좀 그렇습니다만….”

“어, 아니다. 혹시나 해서” 하시면서 온갖 대소사를 혼자 처리하시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대검 중수부 검사로서 거대한 부패구조의 핵을 밝히는 일에 나서야 했다. 검사의 직을 건 마지막 한판 승부였다.그러나 나에게는 지혜가 부족했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그 지혜의 원천을 잃었던 것이다.

결국 ‘성역없는 사정(司正)’은 구호로만 남고 숱한 의혹만 남긴채 수사는 막을 내렸다.

검사를 그만두기 전 나는 아버지 묘소 앞에 앉아 소주잔을 부으며 지혜를 달라고 갈망했다. 아버지는 분명 어떻게 하라고 하셨을텐데 나는 귀가 먹었는지 눈이 멀었는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한동안 방황했다.

지금도 가끔 고향 양양에 내려가면 동네 어른들이 마디 굵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며 “자네 부친이 더 사셨더라면 좋았을 걸”하신다.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그늘아래 살고 있다.

약력

●51년 강원도 양양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사시 22회합격

●서울지검검사 대검중수부연구관 서산지청장

●93년 동화은행 비자금사건 주임검사

●94년 변호사 개업.

함승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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