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이스터 섬 쇠망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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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9월 14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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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 세계의 불가사의를 다룬 책들에서 본 이스터 섬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다른 사회와 접촉하려면 비행기로 수천 km를 날아가야 하는 남태평양 외딴섬에는 거대한 돌기단과 길이가 9m에 머릿돌 무게만 12t에 이르는 석상이 즐비하다. 책들은 “외계인들이 우주선 고장으로 섬에 불시착해서 석상들을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 고고학은 외계인이 아니라 섬 주민들이 석상들을 세웠음을 과학적인 증거로 설명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석상들은 한 사회가 외부 침입이나 급격한 환경변화 없이 ‘스스로 선택한 문명 붕괴’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는 ‘문명의 붕괴’라는 책에서 이 섬의 족장과 성직자들은 신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지배자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짓는 경쟁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육중한 돌을 운반하기 위한 통나무가 필요했고 큰 나무들이 끝없이 베어졌다. 약 600년간 진행된 이 경쟁으로 삼림은 완전 파괴됐고 야생동물도 없어지면서 낙원은 지옥으로 변한다. 끝내는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풍습까지 생겨나고 문명은 파괴된다.
#2 이스터 섬 이야기를 접하면 ‘왜 섬 주민들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거대한 석상 만들기는 엘리트층에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화와 위신을 안겨주었고, 노동력을 제공한 주민들에게는 음식과 정신적인 안정을 주었다. 사회 구성원들이 당시 잣대로는 합리적인 이유로 선택한 어떤 문화가 장기간 누적돼 끔찍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한국의 저출산과 지나친 교육열도 자발적인 문명 붕괴의 진행형이 아닐까. 한국의 젊은 부부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로 아이를 덜 낳는다. 직장여성이 육아 과정에서 겪는 고생과 불리함, 아이의 교육과 결혼에서 부모가 감당하는 경제적 부담 등을 생각하면 저출산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정부가 각종 혜택을 주려 하지만 자식 낳고 기르는 데 들어갈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희생을 상쇄시켜 주기는 어렵다.
지나친 교육열로 인한 사교육과 조기유학 풍토도 합리적 선택의 결과다. 다음 세대의 부와 권력, 명예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한국 사회의 규칙이 변하지 않는 한 부모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저출산의 원인이기도 하면서 교육의 공적 기능인 미래 세대의 인재를 길러내고 선발하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경제개발 초기에 나름대로 유효했던 저출산과 교육열이 이제는 유효성을 상실했지만 누구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사회적 덫’이 된 것이다.
경제학은 개별 구성원들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 전체에 해를 가져오는 문제에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민주정부와 국회가 유권자가 최우선으로 요구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시스템을 크게 바꾸고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 두 문제는 유권자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임계점을 지나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한 가지 위안은 그 임계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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