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시네마테라피) 영국 스파이물의 새로운 해석, 킹스맨

  • 입력 2015년 5월 4일 11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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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007>은 대단한 영화였다. 젠틀한 영국 탐정 제임스 본드가 적들을 쳐부쉈다. 제임스 본드는 항상 슈트를 입고 등장한다. 위기에 처해서도 여유 있는 웃음으로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고 묘한 영국식 위트를 본드걸과 적에게 남발하고는 했다.

그는 적을 대할 때도 신사적이었다. 그런 제임스 본드를 적들 역시 신사적으로 대했다. 적을 죽일 수 있는데도 제임스 본드는 기다렸다. 적들 역시 제임스 본드를 죽일 수 있는데도 기다렸다. 마치 중세시대 기사들이 결투하듯이 그들은 스파이 활동을 했다.

그런데 <007> 주인공 제임스 본드 역할을 장기 집권하던 숀 코네리와 로저 무어의 시대가 가고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의 과도기를 거쳐 다니엘 크레이그로 오면서 제임스 본드는 바뀌었다.

칼럼니스트 최명기


현대적 감각으로 전통을 잇다

제임스 본드는 더는 미소를 달고 다니지 않는다. 현재의 제임스 본드는 과거의 괴로움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과거에는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강력하고 단순한 목표가 있었기에 고민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과연 무엇이 정의인지 고민한다.

제임스 본드의 공적 측면과 사생활이 충돌한다. 제임스 본드는 어떤 점에서 인간다워졌지만 동시에 무력해졌다. <킹스맨>은 그런 제임스 본드를 대체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MI-5와는 또 다른 기관이 필요하다. 그동안 영국의 첩보 영화에는 항상 MI-5가 등장했다. 그리고 <007>을 보면 영국이 아직도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영국은 더는 세상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MI-5 역시 세상을 좌지우지 못 한다. 영화 속에서와 현실의 괴리감이 너무나 크다 보니 신세대 영국 스파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기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킹스맨’이다.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던 기관이기에 마음대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다. 사적으로 존재하는 비밀기관이므로 어떤 방식으로 적을 죽여도 상관없다.

킹스맨이 양복점의 외양을 띠고 있는 것도 일종의 상징이다. 영국의 성공은 산업혁명 후 옷감을 짜는 직물산업이 세계를 석권하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양복이 흔하다. 하지만 과거의 좋은 양복은 지금으로 따지면 벤츠나 BMW에 해당되었다. 그만큼 양복은 비쌌고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킹스맨에서 양복점은 전통을 상징한다. 콜린 퍼스가 주연을 맡은 해리 하트는 전통을 상징한다. 그런 맥락에서 킹스맨은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를 패러디한다. 킹스맨의 최고 수장은 “아서”라고 불리는데 전설 속의 아서왕을 본 딴 것이다. 랜스롯, 갤러하드, 퍼시발 모두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이름이다.


상류문화 지향의 성장기

킹스맨은 영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한 국가가 성장할 때는 중산층이 늘어난다. 실제 자신의 사회경제적 현실은 하류층이더라도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산층이 쓰는 물건, 중산층이 모는 차, 중산층이 사는 집을 선망한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의 국민차가 프라이드에서 소나타로 바뀌었다. 또 중산층은 상류층을 선망한다. 그러다보니 빚을 얻어서 명품을 사고, 중대형 아파트를 사고, 수입차를 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국가가 저성장에 빠져들면 사회 전체가 하류지향이 된다.

과거에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하게 보여야 했다. 그래서 품위 있는 말을 쓰고 매너를 지켰다. 하지만 성장이 멈춘 혹은 뒷걸음질하는 사회에서는 하류문화가 주류가 된다. 욕이 일상어가 되고 남이 보건 말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입고 싶은 대로 입는다. 태론 에거튼이 주연을 맡은 에그시는 그러한 하류문화를 상징한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장영화가 된다. 하류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의식에 찌든 에그시가 인생의 멘토 해리 하트를 만나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영화 속에서 에그시가 언급하는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오드리 헵번 주연의 뮤지컬이다. 영국 상류층 신사가 하류층 여인을 완벽한 숙녀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내기한다. 신사는 여인을 숙녀로 바꾸는 프로젝트에 돌입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리고 신사는 자신이 만들어낸 숙녀와 사랑에 빠진다. 마찬가지로 에그시 역시 해리 하트의 도움을 받아 ‘킹스맨’이라는 신사로 바뀌게 된다.


풍자와 조롱의 쾌감

영화 <킹스맨>은 철저하게 세상을 풍자하고 조롱한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 엄청난 금액을 재단을 통해 투자하는 IT 갑부 발렌타인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 빌 게이츠를 패러디한 것이다.

빌 게이츠는 매년 천문학적인 액수를 기부하고 있다. 그래서 국내 재벌들의 탐욕스러운 행동이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대비되어 언급된다. 이토록 너무나 선한 모습을 연출하는 빌 게이츠가 <킹스맨>에서는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휴대폰을 사용하면 뇌가 뜨거워지면서 공격적이 된다는 설정은 휴대폰이 뇌종양을 증가시키느냐에 대한 논쟁을 패러디한 것이다.

흑인, 유대인, 동성연애자를 비난하는 근본주의 교회에서 살인극이 벌어지는 것도 그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풍자한 것이다. 만약에 한국영화에서 이런 살인 장면이 연출되었다면 종교계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영국의 엘리트들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언급하고는 한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킹스맨의 수장 아서의 추천으로 들어온 귀족의 후예 찰리는 훈련과정 중에 죽음의 위기가 발생하자 킹스맨을 배반하겠다고 해서 선발과정에서 퇴출당한다. 그리고 전 세계의 지도층이 자신만 살겠다고 발렌타인이 마련한 안전장소에 모여서 10억의 인구가 죽어 가는데 축배를 마시는 장면 역시 지배계급의 위선을 보여준다.

그 무엇보다 인류가 지구를 망치든, 지구가 인류를 망치든, 어느 쪽이 되었건 ‘인류가 멸망하니까 인구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발렌타인의 발상 그 자체가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강렬한 풍자다.


넋 놓게 만드는 액션신의 계보

이 영화에서의 액션 장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액션 장면이 연출되기까지에는 역사가 필요했다. 본래 서구영화에서의 액션신은 주로 총격신이었고 주인공이 총을 쏘면 순서대로 악당들이 쓰러지는 단순한 구조였다. 주먹을 쓰는 장면도 몇 번의 격투가 오가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이러한 할리우드 영화가 기존의 액션장면을 뛰어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이소룡의 등장이었다. 이소룡의 강력하면서도 우아한 동작은 수많은 추종자를 낳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스티븐 시걸의 물 흐르는 듯한 액션, 장 끌로드 반담의 빠르고 정확한 액션 동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 서구영화의 액션 장면을 다음 단계로 진일보시킨 이는 쿠엔틴 타란티노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오우삼의 팬이었다. 춤을 연상시키는 홍콩 느와르의 슬로비디오 액션 장면을 쿠엔틴 타란티노는 미국식 영화어법을 첨가해 시각적으로 더욱 완벽하게 승화시켰다.

<킬 빌>에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그러한 액션을 극한까지 추구했다. 매튜 본 감독은 <킥 애스: 영웅의 탄생>에서 나름 괜찮은 액션장면을 선보였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진일보했다.

그리고 드디어 <킹스 맨>에서 이 시대 최고의 액션 장면을 연출해냈다. 화제가 된 교회 격투신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샘 레이미 감독의 1982년 고전 <이블 데드>가 떠올려진다. 그리고 제한된 공간에서의 집단살인 장면은 수없이 많은 좀비 영화를 거치면서 더 잔인하고 더 선명하게끔 진화되었다. 그들이 교회 살인 액션신의 기초가 된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안전지대에 도피한 위선적인 사회지도층의 뇌가 터지면서 버섯 모양을 그리는 것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고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의 핵폭발 장면이 떠올려진다.

온 인류를 죽여서 지구를 살리겠다는 발렌타인의 과대망상적인 사고는 나치주의자였던 천재 과학자 스트레인지러브 박사(Dr. Strangelove) 캐릭터의 변형된 형태다. 그리고 머리가 터지는 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 <북두신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영국식 스파이물의 정석을 보고 싶다면 <킹스맨>에서 해리 하트 역을 맡은 콜린 퍼스가 주연을 한 또 다른 스파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2011)>를 권하고 싶다.

이 영화는 <킹스맨>의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하는 영화다. 콜린 퍼스는 이 두 영화에서 모두 주연을 맡는다. 그러나 연기 스타일은 같은 배우가 역을 맡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상반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2011)>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러시안 하우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르 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파이물이다. 액션은 거의 없고 엄청나게 머리를 많이 써야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머리를 쓴 만큼의 보람을 안겨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emede.net)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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