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탄생’을 재현한다…거대 강입자가속기 건설 박차

  • 입력 2003년 3월 2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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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도자석이 설치될 길이 27km의 지하 터널 내부. 아직 본격적인 설치가 시작되지 않아 텅 비어있다. -제네바=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빅뱅을 재현한다.

스위스와 제네바 근교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2007년 4월 완공을 앞두고 거대강입자가속기(LHC=Large Hadron Collicer)의 본격적인 조립이 시작돼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50개국이 40억 달러를 들인 가속기가 완성되면 길이 27㎞의 원형 지하터널 속에서 빛에 가까운 속도로 달려오는 양성자가 서로 정면 충돌한다. 이 순간 가속기는 우주 탄생 직후인 빅뱅 1조 분의 1초 뒤의 고(高)에너지 상태를 만들게 된다.

빅뱅 직후 우주는 에너지로만 가득 찬 상태였다. 시간이 흘러 에너지가 물질로 바뀌면서 원자와 별이 만들어진 것. 이 가속기는 150억 년 전 에너지가 물질로 전환돼 우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재현한다.

가속기 양성자 빔의 에너지는 14조 전자볼트. “1조 전자볼트는 날아가는 모기의 운동에너지와 같지만 LHC가 대단한 것은 이 에너지를 모기 크기의 1조 분의 1보다도 작은 공간에 집중시킨다는 점이다.” 안내를 맡은 물리학자 헨릭 포트 박사의 설명이다.

지상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분쯤 내려가자 드디어 가속기 조립을 준비 중인 지하 100m의 터널에 도착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지하요새였다. ‘지상의 가장 큰 구조물은 만리장성이고 가장 큰 지하 구조물은 CERN이다’는 말이 실감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터널에는 전기자동차가 인부를 태우고 다닌다.

둘레 27km의 지하 터널에 조립될 초전도자석을 설치에 앞서 시험하고 있다. -사진제공 CERN

여기서 양성자를 빛의 99.99999%로 가속하는 것은 초전도 전자석이다. 이곳에 터널을 따라 15m짜리 초전도 전자석 1232개가 들어서게 되고 이 자석은 절대온도 2도(영하 271℃)의 헬륨으로 채워진다.

초전도 전자석 내부에는 두 개의 파이프가 있어 양성자가 반대 방향으로 가속된다. 가속된 양성자가 충돌하는 곳은 4군데. 이곳에 건물 6층 높이의 거대한 입자검출기를 설치해 충돌로 얻은 높은 에너지가 어떤 입자를 생성하는지 관찰한다.

20세기 물리학은 가속기로 기본입자 12개를 찾아냈다.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6개의 쿼크와 6개의 렙톤이 그것. 12개의 기본입자를 찾아내고 이를 토대로 표준모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20명이 넘는 물리학자가 노벨상을 받았다.

12개의 기본입자 가운데 가장 무거운 톱 쿼크는 95년 미국 시카고 근교의 테바트론가속기에 의해 발견됐다. 입자는 무거울수록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무거운 입자를 찾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가속기가 필요하다.

물리학자들이 테바트론보다 7배 강한 LHC를 만드는 첫째 이유는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서다. 힉스는 질량을 만드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입자이다. 이 입자는 표준모형이 맞다면 반드시 존재해야 하지만 매우 무거워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만일 힉스가 없었다면 우주는 질량이 제로(0)일 것이다.

힉스입자는 힉스장을 만든다. 입자가 힉스장과 얼마나 상호작용 하냐에 따라 질량이 결정된다. 진흙탕에서 세게 뒹굴수록 흙이 많이 묻는 것처럼 힉스장에서 상호작용을 많이 하는 입자가 무겁다. 6종의 쿼크가 질량이 1000배나 차이가 나는 것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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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근교 스위스,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붉은색 원이 둘레 27km로 건설된 지하터널이다. 이 터널 내에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2007년 들어서게 된다. -사진제공 CERN

고려대 물리학과 박성근 교수는 “힉스는 우주 초기의 매우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 일상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며 “가속기로 태초의 환경을 재현하는 것이 힉스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LHC를 통해 확인하려는 또 하나의 이론은 초대칭이론이다. 현재 우주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 4개의 힘이다. 강력은 중력보다 1038배나 크다. 하지만 4개의 힘은 빅뱅 직후 하나의 힘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물리학자들은 본다. 4개의 힘이 모두 엉겨붙은 통합된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초대칭이론이다. 이 이론이 맞다면 LHC에서 모든 입자에 대해 짝을 이루는 초대칭 입자가 발견돼야 한다.

98년까지 CERN의 소장을 지낸 옥스퍼드대 크리스 스미스 교수는 “CERN은 유럽의 연구소였으나, LHC가 건설되면서 전세계 실험 입자물리학자의 절반이 넘는 7000명이 이용하게 될 전망이다”고 말했다. 이런 협동연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인터넷. 최초의 월드와이드웹은 CERN의 과학자인 팀 버너스-리가 1989년 하이퍼텍스트에 기반한 정보시스템을 전세계 과학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제안함으로써 등장했다.

▼한국 정부차원 첫 실험 참여▼

고려대 물리학과 박성근 교수가 힉스 입자를 찾는 데 쓰이게 될 국산 전방저항판검출기 모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한국이 거대강입자가속기(LHC)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국내 10개 대학 연구팀이 20억원을 들여 가속기의 ‘전자눈’에 해당하는 검출기의 주요 부품을 제작해 납품하고 직접 실험도 한다. 그동안 국내 물리학자들이 개인적으로 가속기 실험에 참여한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정부의 지원 아래 직접 장비를 만들어 제공하는 것은 처음이다.

한국이 참여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해온 인물은 고려대 검출기연구소 박성근 교수(입자물리학)이다. 박 교수는 LHC의 CMS 검출기의 중요 부품인 전방저항판검출기를 독자 개발했고, 올해부터 2006년까지 800개를 납품하게 된다. 박교수는 “제공할 검출기부품을 바닥에 늘어 놓으면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바닥을 덮을 만큼 넓다”고 말한다.

LHC에는 4개의 검출기가 건설되지만,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은 CMS와 ATLAS 두개의 검출기 이다. CMS 검출기의 제작에만 한국을 비롯해 37개국 1941명의 과학자가 참여하고 있다.

두 개의 검출기는 모두 힉스입자를 찾는 게 주목적이다. LHC에서 양성자끼리 충돌해 태초의 높은 에너지 상태가 되면 힉스 입자가 생성된다. 하지만 힉스는 생성되자마자 붕괴해 4개의 뮤온입자가 된다. 뮤온은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여러 종류의 검출기를 이온화시킨다. 이를 포착해 힉스 입자의 생성 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CMS에서 양성자끼리 충돌하는 횟수는 초당 8억번. 하지만 정작 힉스가 생성되는 것은 하루에 하나 정도다. 이를 찾는 것은 짚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어렵다. 따라서 고성능 검출기와 컴퓨터가 1500만개의 채널로 입자의 궤적과 운동에너지를 감시한다.

힉스 입자를 찾는 데 쓸 CMS 검출기가 스위스 현지에서 조립되고 있다. 한국은 이 검출기에 사용될 핵심 부품과 장비를 제공했다. -사진제공 CERN

현재 연구소 지상에서는 건물 6층 높이의 CMS 검출기 뼈대를 조립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박 교수는 “CMS 검출기의 전체 무게는 1만2500t으로, 에펠탑의 2.5배나 되는 철이 검출기 제작에 쓰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큰 규모의 검출기를 조립하는 것도 쉽지 않다. 두산중공업은 훌륭한 검출기용 조립운반장치를 제공해 24일 CERN으로부터 외국기업에 주는 최고상을 받았다. 한국의 LHC 참여를 결정했고 현지 시상식에도 참가한 서정욱 전 과기부 장관은 “이제 한국도 다양한 국제공동연구에 동반자로 참여해 여기에서 파생돼 나오는 첨단 기술과 경험을 공유해야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네바=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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