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본 세상]단속평형이론

  • 입력 2002년 6월 30일 17시 35분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
월드컵 본선 전적 4무 10패. 반세기 동안 한번도 상대를 이기지 못한 한국 축구팀이 유럽의 강호 4팀을 연파하며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이뤄냈다. 한국 축구의 도약은 너무 극적이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일순간에 뒤바뀐 역사를 여러차례 경험해 왔다.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 ‘인터넷 혁명’ 등이 그것이다.

자연도 점진적 발전보다 순간적 도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20년 동안 지병인 암과 싸우다 한달 전 쯤에 세상을 떠난 하버드대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는 진화에도 한국 축구와 같은 ‘대도약’이 자주 일어난다는 ‘단속평형이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그의 이론은 자연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사회과학자, 심지어는 ‘디지털 다윈이즘’의 신봉자인 빌 게이츠도 자신의 저서에 인용할 정도이다.

다윈 이후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생물이 환경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점진적으로 진화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 이론의 약점은 화석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수많은 화석이 나왔지만 목이 짧은 기린 등 진화 중간단계의 화석은 여간해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단속평형이론이다. 굴드는 생물이 오랜 기간 동안 거의 변하지 않다가, 환경이 변화하면 갑작스럽게 형태의 변이나 종의 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즉 생물은 생태계가 안정된 평형 상태에서는 오랜 동안 거의 진화하지 않다가 빙하기, 운석 충돌 등으로 평형 상태가 깨지면서 순식간에 진화하거나 소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진화의 역사에서 그런 사건이 자주 있었다. 예를 들어 지구의 생명체는 30억년 동안 단세포 생물로 존재해오다가 5억7천만년 전 대빙하기가 끝나면서 어류 등 무수한 고등생명체로 폭발적인 진화를 했다. 이를 ‘캄브리아 생물 폭발’이라고 한다.

고전물리학에서 탈피해 현대물리학의 문을 활짝 여는데 돌파구를 마련한 양자론도 자연을 ‘불연속적 도약의 과정’으로 본다. 원자에 에너지를 가하면 핵주위를 도는 전자는 낮은 궤도에서 높은 궤도로 점프하면서 에너지 준위가 계단을 오르듯 불연속적으로 증가한다. 이런 양자(量子)화된 도약을 ‘퀀텀 점프’라고 한다.

흔히 사회나 기업 또는 기술의 발전 과정을 보면 오랜 기간 정체 상태에 있다가 순식간에 ‘퀀텀 점프’를 하는 경우가 많다. 4무 10패의 ‘천덕꾸러기’ 축구팀이라고 해서 4강으로 점프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힘을 합쳐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퀀텀 점프’의 행운을 잡을 수 있다. ‘도약’이 불가능하다는 패배의식이 오히려 비과학적인 생각이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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