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123>그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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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정두리(1947∼ )

우리는 누구입니까.
빈 언덕의 자운영꽃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
이름을 얻지 못한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
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다가오는 첫눈입니다
(…)
우리는 어떤 노래입니까.
이노리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 나게 하는
눈물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대와 나는 두고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

네가 깨끗한 얼굴로 내게로 되돌아오는 길
그대와 나는 내리내리 사랑하는 일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연말만 되면 조금 착해지고 싶다. 성스럽지는 못해도 차마 나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남의 기억 속에 나쁜 내가 없기를, 나의 기억 속에 나쁜 일이 지워지기를 바라는 때가 바로 요맘때이다. 잘못을 용서하고 털어내 가면서 2017년과 작별하고 싶은 것이다.

12월이니까 모처럼 착하고 깨끗해져 보자. 기왕이면 너그럽고 사랑스러워 보자. 그래서 오늘은 흰 눈처럼 깨끗한 시, 겨울바람처럼 맑은 시를 골랐다. 착한 사람의 착한 마음을 응원해줄, 더없이 착한 시다.

자운영, 조약돌, 첫눈이 등장하는 첫 구절이 곱다. 자운영, 조약돌, 첫눈은 모두 사소하지만 귀하고 예쁘다. 시인은 우리도 그것들처럼 작지만 소중한 존재라고 말한다. 세상 누구도 하찮거나 비루하지 않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는 귀한 존재다. 얼마나 귀한 존재냐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게 만든다. 또한 우리는 눈물 나는 세상마저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 이 시에서 가장 좋은 구절, 가장 힘이 되는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세상은 내가 있어야 존재하고, 소중한 나로 인해 아름다워진다. 이 시가 말해주기 전에는 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말고사 못 봤다고 풀이 죽은 아이에게 이 시를 읽어주고 싶다. 연말 실적이 안 나서 울적한 이에게 읽어주고 싶다. 도움이나 위로가 못 된다고 해도 계속 읽어주고 싶다. 딱히 이유를 찾아야 우리가 소중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운영과 조약돌과 첫눈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무조건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시인 정두리#자운영#조약돌#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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