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비행기]‘길지’도 전쟁을 피해갈 순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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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북간도의 한 농가 모습. 동아일보DB
1908년 북간도의 한 농가 모습. 동아일보DB
청나라는 만주족이 흥기한 근본이 되는 땅이라며 중국 동북지방에 다른 민족의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재해 등으로 생긴 유민이 흘러드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도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걸 엄격히 처벌했지만 마찬가지였다.

1619년 조선과 명 연합군이 후금(청)에 패했을 때부터 패잔병들이 살았을 것이고, 뒤에도 사냥꾼이나 화전민들이 눈치 보지 않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간도 개척과 이주가 본격화된 뒤 청나라와 조선(대한제국)은 간도의 영유권을 놓고 대립한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가 최근 연 ‘지역사’ 관련 학술대회에서 ‘대한제국기 압록강 두만강 일대 변경의 장소성’(은정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발표문은 청조와 대한제국의 정규군, 민간 군사력이 서로 충돌하면서 보복의 악순환을 일으켰던 데 주목했다. 이 지역은 일종의 피난지이자 이상향 같은 곳이었으나 경계를 획정하려는 양국의 충돌로 주민들의 삶이 갈수록 악화됐다는 것이다.

실재했던 ‘우복동’(牛腹洞·풍수적으로 소의 배 속처럼 생겨 전쟁 등을 피할 수 있다는 길지)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사편찬위원회#지역사#우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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