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레드라인보다 레드존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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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거친 말만 하고 큰 몽둥이 쓸 생각 없어… 북한 김정은에 안 통해
문재인, ‘전쟁은 안 된다’는 부드러운 말 할 때는 큰 몽둥이 갖고 있어야
전술핵이 큰 몽둥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는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2015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면서 ‘불구가 된 미국’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널뛰기하는 듯이 보이는 그의 언행이 나름대로 상당한 일관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큰 몽둥이를 지니고 있으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는 말을 남겼다. 트럼프는 반대다. 그는 북한에 “군사적 옵션을 포함해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올라 있다”고 엄포를 놓고 중국에 “북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 환율조작국 지정도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그가 부동산 사업에서 익힌 협상의 기술 중 하나가 일단 거칠게 말하고 보자는 것이다.

정말 조심해야 할 상대는 부드럽게 말하는 쪽이다. 부드럽게 말하는 쪽이 큰 몽둥이를 쓸 가능성이 높다. 거칠게 말하는 쪽은 몽둥이를 쓸 생각이 없어 말로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다. 몽둥이를 쓰는 데는 돈이 들어간다. 사업가 출신 트럼프는 그런 돈이 아까운 것이다.

중동은 석유라는 자원이 있으니까 석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에서라도 큰 몽둥이를 쓸 수 있다.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는 중동에서 큰 몽둥이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빌 클린턴 이래 북핵을 다룬 모든 미국 대통령의 고민은 북한에 대해서는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런 큰 몽둥이를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트럼프는 심지어 중동에서 큰 몽둥이를 쓴 것도 미국에는 이익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그런 그가 북한에 대해 큰돈이 들어가는 큰 몽둥이를 쉽게 쓸 리가 없다. 북한 도발의 와중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지란 말을 흘리며 한국을 압박해 경제적 이득을 얻어낼 궁리를 하는 게 트럼프란 사람의 본색이다.

뉴욕군사학교를 나온 트럼프는 군사력을 실제 사용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보다는 군사력의 압도적 우세를 과시함으로써 상대방을 지레 겁먹게 하는 게 돈이 덜 든다고 여긴다. “화염과 분노” 같은 거친 말만 늘어놓고 매번 위력 시위나 하고 돌아가는 것은 트럼프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군사력의 돈 안 드는 활용법에 따른 것이다. 위력 시위 후 북한이 잠시 조용해지자 “김정은이 현명하다”며 그 효력이 하루도 못 갈 말을 하는 것은 무너지는 믿음에 대한 안타까운 집착이다.

큰돈이 들어감에도 큰 몽둥이를 쓰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 트럼프는 동맹국들을 미국의 군사비나 축내고 무역을 통해 미국의 이익이나 빼내가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 자유의 가치를 함께 지킨다는 정신은 희미해졌다. 트럼프의 미국은 자유의 제국에서 한 힘센 국가로 후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전쟁만은 안 된다’는 말을 ‘북핵은 안 된다’는 말보다 앞세운다.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 북핵을 용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만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몽둥이도 없이 부드러운 말을 하는 상대만큼 우스운 상대도 없다. 전쟁만은 안 된다는 부드러운 말은 큰 몽둥이를 갖고 있지 않으면 무력한 투항일 뿐이다.

전술핵이 우리가 가져야 할 큰 몽둥이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전술핵을 한국에 재배치하고 한미가 그 사용을 공유하는 것이 시급해졌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아직 레드라인(red line)을 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레드라인이라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 핵 보유는 명확한 선(線)을 긋기 어려운 면(面)의 개념이다. 북한은 핵 보유라는 레드 존(red zone)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고, 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

실은 전술핵 배치를 간절히 원해도 트럼프가 순순히 내줄지가 더 걱정이다. 문 대통령의 사드 배치 태도에 실망한 트럼프는 전술핵을 공유할 만큼 문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존의 군사동맹에 대해서도 돈을 더 내라는 트럼프가 한미 FTA 양보 등 대가를 안겨 주지 않아도 전술핵을 배치해줄지 의문이다. 그러나 압박이건 대화건 전술핵을 일단 배치해 놓은 다음의 얘기다. 지금 문 대통령의 지상과제는 트럼프를 설득하든 협박하든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든 전술핵을 배치하는 것이다. 전술핵으로 최소한의 핵 균형을 이루는 것이 북한의 오판을 막아 전쟁을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대통령 사드 배치 태도#트럼프의 전술핵#전술핵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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