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의 재발견]어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컴퓨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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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미 서강대 국제한국학연구센터 연구교수 국어국문학
김남미 서강대 국제한국학연구센터 연구교수 국어국문학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책 이름이 있다. 이 이름은 ‘넘어’와 ‘너머’의 관계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돕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예문을 보자.

①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②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어떤 표기가 맞을까? 재미있는 것은 컴퓨터 자판상에는 둘 모두 오류 표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먼저 소설의 의도로 본다면 ①이 옳은 표기다. 100세 노인은 창문을 넘어 도망쳤으니까. 여기서 ‘넘어’는 ‘넘다’가 문장에서 바뀐 것이다.

― ‘넘고, 넘어, 넘도록, 넘으니, 넘더라도, 넘으려면, 넘어도, 넘으므로, 넘는, 넘을지라도, 넘든지, 넘기….’

‘넘다’는 이렇게 복잡하게 바뀌면서 문장 안에서 다양한 기능을 한다. 같은 의미의 단어는 동일하게 적어야 의미 전달이 쉽다. 소리가 바뀌더라도 모두 ‘넘-’을 밝혀 적는 이유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변화형이 같은 단어라는 것을 정확히 안다. 심지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정확하게 구분해서 쓰고 있다. 우리들의 머릿속 규칙이 갖는 힘이다.

그러면 ②는 왜 ‘넘-’을 밝혀 적지 않는 것일까. ②의 표기가 올바르려면 아래 의미로 쓰여야 한다.

― 창문 너머에 도망친 100세 노인이 있다.

‘너머’에는 ‘넘어’와 달리 행동이 들어 있지 않다. 그냥 ‘높이나 경계로 가로막은 사물의 저쪽. 또는 그 공간’이라는 의미의 명사다. 둘을 명확히 구분하려면 한 문장에 모두 넣어 보는 것도 좋은 시도다.

― 산 너머를 보려고 저 산을 넘어 간다.

여기서 ‘너머’는 ‘넘다’처럼 복잡하게 바뀌지 않는다. 국어에서 복잡하게 형태가 변하는 것은 동사나 형용사 그리고 ‘-이다’뿐이다. 명사는 언제나 같은 모양을 유지한다.

누군가는 이런 멋진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너머’라는 단어 역시 ‘넘다’에서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현재 그런 것은 아니다. ‘너머’라는 단어는 과거의 시점 언젠가는 ‘넘다’라는 단어로부터 나온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에는 ‘넘다’와 의미가 멀어져 새로운 단어가 되었다. 어원에서 멀어져 새로운 단어가 된 것은 어원대로 적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것이 맞춤법 원리다. 그래서 ‘넘어’와 ‘너머’를 구분해 적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았다. 컴퓨터 화면상의 빨강 줄에 관련된 것이다. 누군가는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이 보이는 해석이 억지스럽다고 반론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이런 해석은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일단 우리에게는 ‘넘어’라는 단어가 훨씬 더 익숙하다. 또 뒤에 연결되는 ‘도망친’이 어색함을 가중시킨다. ‘넘어 도망친’이라는 연결이 우리에게 훨씬 자연스럽다.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할아버지’처럼 숨표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여기서 짚어야 할 지점은 컴퓨터는 이런 어색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저 사용 정보가 저장되었으면 올바른 표기라고 인식할 뿐이다. 우리가 의미와 표기의 관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조건 컴퓨터에 맞춤법 교정을 맡겨서는 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김남미 서강대 국제한국학연구센터 연구교수 국어국문학
#넘어#너머#맞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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