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변칙 복서 트럼프와 ‘탄핵 코리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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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기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즐겨 쓰는 흰색 모자를 하나 갖고 있다. 7월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기념품으로 산 것이다. 하지만 그의 구호인 ‘Make America Great Again’이 크게 적혀 있어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대선 전 이 모자를 쓰고 커피숍에 갔다가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 “당신 트럼프 지지자였어?”라는 말을 들었다.

 기자는 10일 이 모자를 쓰고 다시 그 커피숍에 갔다. 그 직원이 있었다. 예상되는 반응이 귀찮아 모자를 벗으려 했더니 직원이 “모자 멋진데”라고 했다. “마음이 변했냐?”고 물었더니 “(트럼프가) 예상보단 덜 미친 것 같다”며 웃었다.

 트럼프가 8일로 당선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미국 안팎에서 이런 반응을 자주 접한다. 트럼프가 정적을 만나고,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는 뉴욕타임스까지 찾아가는 광폭 행보에 따른 인식 변화였다. 미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워낙 기대 수준이 낮아서 그런지 우려했던 것보다는 잘한다”고 했다. 대선 후 트럼프를 처음 인터뷰했던 CBS 시사프로그램 ‘60분’ 레슬리 스타 기자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훨씬 심각하게 국정 사안을 보고 있었다. 껄렁껄렁한 자세도 변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인식은 한국 정부도 비슷하다. 지난달 트럼프 당선인 주변 인사들을 만나러 미국에 온 정부대표단은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자의 ‘핵심 동맹(vital alliance)’이란 말에 무게를 두며 미래의 한미 관계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한 관계자는 “트럼프는 주로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 변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지난 한 달간 보여준 정치적 결정, 특히 가장 중요한 차기 내각 인선을 뜯어보면 이런 인식은 성급해 보인다. 그는 사람들이 “트럼프가 변했나?”라며 헷갈려하는 틈을 타 철저히 자신의 입맛과 국정 방향에 맞는 인선을 밀어붙였다. 상무장관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온갖 FTA에 반대해 온 월가의 기업사냥꾼 윌버 로스를 앉혔다. 국방 장관(제임스 매티스) 국토안보부 장관 후보자(존 켈리)는 군인 출신 중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에 딱 들어맞는 사람을 골랐다.

 물론 트럼프는 대선 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등 한국 관련 이슈에 대해 아직까지 별다른 언급이 없다. 하지만 권투로 치면 종잡을 수 없는 변칙 복서인 트럼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 등 국정 최우선 과제를 정리하고 나면 언제 어떻게 한국 이슈를 꺼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사업가로 평생 협상을 해 온 트럼프로서는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이 공석인 한국은 ‘좋은 먹잇감’이다. 한국이 몸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줄 이유가 없다.

 “트럼프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 연구원 소개로 트럼프의 이전 동영상을 최근 봤다. 28년 전인 1988년 유명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올해 대선 기간과 똑같은 말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는 동영상에서 “지금 일본이 미국 시장에 TV를 얼마나 많이 팔고 있는 줄 아느냐. 그들이 우리 일자리의 싹을 말리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이 말에 ‘한국’을 추가해 28년 뒤인 올해 미 전역을 돌아다녔다.

 미국인들이 자주 쓰는 격언 중에 “Hope for the best, Plan for the worst”라는 게 있다.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되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하라는 말이다. 미증유의 국정 공백을 겪고 있는 한국 정부와 컨트롤타워 없이 트럼프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들이 새길 말이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트럼프#탄핵#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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