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푸틴의 검과 아베의 갑옷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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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도쿄 특파원
서영아 도쿄 특파원
2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주고받은 선물에서는, 뭐랄까 전쟁의 냄새가 물씬 났다.

푸틴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1928년 쇼와(昭和) 일왕이 즉위식에서 사용했다는 12개의 검 중 한 자루를 선물했다. 전후 해외로 유출돼 돌아다니던 것을 러시아가 입수했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푸틴에게 사무라이 투구와 갑옷을 줬다. 푸틴이 “이거 입고 일할까”라고 농담하자 동석했던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러시아경제협력담당상이 “아베 총리가 일터에서 저 칼을 쓰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라고 받아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칼과 갑옷이 등장한 정상회담 장면을 보면서 그동안 일본이 지향해온 ‘보통 군사국가’가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단계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러-일 정상회담 소식을 전하는 3일자 일본 신문에서는 ‘패전 이전의 일본으로의 복귀가 실현될 듯한 기대’가 묻어난다. 일본은 1945년 패전으로 영토도 일부 잃었다. 홋카이도 북단 북방 4개 섬(러시아명 쿠릴 열도)과 오키나와(沖繩) 등이다. 오키나와는 1972년 미국에서 돌려받았지만 북방영토는 여전히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다.

그 북방 4개 섬 중 2개 섬의 반환은 현실화되는 듯하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교섭은 어느덧 ‘평화협정 체결과 2개 섬 반환’을 기정사실화하고 방법론으로 옮겨가고 있다. 일본의 숙원이 아베 총리 대에 와 결실을 맺는 분위기다.

일본의 대(對)러시아 교섭이 미국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됐다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아베 총리는 올 5월에도 유럽 순방길에 러시아 소치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을 만날 정도로 러시아와의 협상에 공을 들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월부터 만류했지만 일본이 누차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의 방일을 12월 15일로 잡은 것도 미국 대선 직후의 권력 공백기를 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새삼 느껴지는 것은 ‘세계를 향해 우뚝 선 일본’에 대한 아베 총리의 집념이다. 중국의 부상, 미국의 퇴조에 발맞춰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화하고 아시아권에서 종주국 역할을 하려는 노력이 조금씩 성과를 거두는 듯하다.

일본은 분쟁에 개입해 싸울 수 있는 국가로 변신해 왔다. 해외 군사 개입의 근거가 되는 안보법제는 11월부터 남수단에서 시행에 들어가려는 참이다. 평화헌법의 개헌 논의에는 미국이 원하는 군사 지원을 하려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는 명분이 동원되고 있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정치군사적 패권을 추구한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국제 현실에선 그 같은 일본의 전략이 알게 모르게 먹히는 상황이다.

‘보통 군사국가 일본.’ 성큼 눈앞에 다가온 현실을 우리는 얼마나 직시하고 있는가. 한국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반발하는 중국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우리가 우방인 미국과의 군사 동맹에 따른 사드 배치를 두고 북한과 동맹인 중국을 의식하는 것은 중국이 이 지역의 군사적, 경제적 대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특히 과학기술에서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경제 강국이다. 이런 일본이 독자적인 ‘보통 군사국가’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다면….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반대하고 비난을 퍼붓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중국은 북한을 도와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일본은 35년간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과거만을 탓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동북아 강대세력 간의 견제와 균형을 활용하기 위해 냉철히 지혜를 모아 가야 한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일본#아베#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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