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기의 음악상담실]트라우마 치유 과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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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자가 머리를 짧게 잘라 달랍니다. 미용실 아줌마가 “아가씨, 무슨 일 있어?”라고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그냥요. 날이 너무 더워서요”라는 여자의 대답에 아줌마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단호한 가위질을 시작합니다. 여자의 뒤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쑥덕이고, TV는 또 다른 비극들을 보도합니다.

미용실을 나서는데, 하늘이 흐려지고 습한 바람이 목을 휘감습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길 위를 뒹굴던 검정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립니다. 비닐봉지는 바람을 거부하며 우왕좌왕하지만, 결국 바람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여자는 그 광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숨이 막힙니다. 내내 글썽이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립니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소중했던 날들이 너에겐 다른 날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렇게 비극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죠.

‘트라우마’는 너무 오용되고 남용되는 의학 용어입니다. 트라우마란 심각한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입니다. 생명에 위협을 받는, 혹은 사회적인 죽음과 비슷한 가치의 부정이나 심각한 비난 등의 외상을 겪은 후 이를 재경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과도한 걱정과 회피반응을 보이는 것이죠.

그 상처는 ‘대부분의 경우’ 무시와 비난이고, 그 가해자는 ‘대부분의 경우’ 안타깝게도 극악무도한 가해자나 나쁜 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이곤 하죠.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트라우마에 대한 언급은 우리의 부모님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비난과 같곤 합니다.

트라우마를 받고 이 때문에 과민반응을 하는 사람은 먼저 또 상처를 받지 않도록 그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해자라면 안타깝지만 그 사람을 떠나야 하고, 이 세상이 가해자라면 이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할 때까지 이 세상을 피해야 하죠.

그런데, 나를 가해하던 잘못된 애착 대상만 피하면 나를 가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나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 사실을 잘 파악하고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과거의 폭행이 현재에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죠. 플래시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현재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의 폭행이 현재는 재연되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어야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죠.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고, 과거에 휘둘리지 않아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트라우마는 우리가 어려서 힘이 없어서 당한 것입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용서하려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수치심과 슬픔은 타인과 공유할 때 줄어드니까요. 과도한 기대를 버리고 한 걸음씩 걸으면 먼 길도 결국 끝이 있습니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내게는 천금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트라우마는 이렇게 치유가 됩니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소라#바람이 분다#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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