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서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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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 이성복(1952∼ )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가 보면 당신계실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7월의 마지막 주와 8월의 첫 주는 세상이 인정하는 공식 휴가철이다. 이때는 거래처가 쉰다고 원망할 수 없고, 창구에 공석이 있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추위를 피하는 피한철보다 더위를 피하는 피서철이 유명한 걸 보니 더위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피서는 부채와 선풍기와 에어컨뿐이다. 사정이야 다양하겠지만 피서도 못 가는 신세를 한탄하는 것은 더위에 울화를 보태는, 위험한 일이다. 정신건강에는 피서를 가지 않을 억지 이유라도 상상해 보는 것이 훨씬 이롭다.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면 이 시를 읽어보자. 이 시에는 남들 다 가는 바다를 거부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지금 서해는 어떨까. 동해만큼, 해운대만큼 북적거릴까. 머드와 갈매기가 있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신나게 놀고 있을 거다. 그런데 이 시인은 서해에 가 본 적이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갈 생각이 전혀 없다. 물론, 무척 가고 싶다. 서해 바다와 개펄을 알고 있는 데다 직접 보고도 싶다. 그러나 앞으로도 서해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이 시의 화자는 서해뿐만 아니라 모든 아름답고 좋은 곳에 가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하는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많은 곳을 가본다면 당신이 있을지도 모를 공간이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디에도 당신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사랑꾼, 그는 잃어버린 당신을 여전히 마음속에 키우고 있다. 서해에 가는 대신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남들은 다 놀고 있는데 나만 일한다면 속상하다. 그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이 사랑꾼은 속삭인다. 유럽의 고성, 대륙의 협곡, 태평양의 에메랄드빛 바다. 우리는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안 가는 것이다. 바로 사랑했던 그 사람이 거기 있을까 봐, 내 사랑만은 그곳에 있으라고.

나민애 문학평론가
#나민애#서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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