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약육강식의 정글사회… 우린 아직 좋은 사람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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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래, 앞으로도. 알았어요.―‘로드’(코맥 매카시·문학동네·2010년) 》

 
우울한 날을 버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왕십리의 한 구석진 카페에 숨어 밀크티를 마신다. 거기도 못 갈 상황이면 굉장히 우울한 책을 읽기도 한다. 주로 온통 잿빛의 세기말이나 인류 종말을 가정한 소설들이다. 터널의 끝에 희미한 빛이 보이듯 우울도 아예 밑바닥을 찍고 나면 그 바닥에 주저앉아 비로소 느끼는 게 있다.

내가 가진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2010년 판이다. 단단했던 모서리가 조금 해어졌다. 책을 펴고 몸을 이불 밑에 묻었다. 그대로 해가 기울고 저물 때까지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로드는 핵전쟁이나 그보다 더 강력한 재앙 이후의 인간 존재를 그렸다. 주요 등장인물은 남자와 소년, 둘뿐이다. 소년은 남자를 아빠로 부르지만 실제 아들인지조차 소설에선 확실치 않다. 마을과 도시와 숲과 강과 모든 것이 잿빛으로 무너져 있고, 공기 중에는 얇은 부유물만 떠다닌다. 남자와 소년이 갈비뼈까지 다 드러낸 채 걸어가고 있는 길 위에선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짐승 같은 일들이 교차한다.

그 와중에도 소년은 끊임없이 “우린 좋은 사람들이죠” “우린 아직 좋은 사람들인 거죠” 하고 남자에게 묻는다. 들짐승처럼 살아가면서도 소년은 버려진 개와 아이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슬퍼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도, 남자는 이 같은 소년이 옆에 있기에 살아남고 걸어갈 수 있다.

“그냥 갑자기 거길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책을 덮고 A가 얼마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20대 직장인인 A는 구의역 사고 이틀 뒤 저녁에 현장인 9-4번 승강장을 찾았다. 퇴근하고 좁은 자취방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나간 거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지하철을 타고 그 역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본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세기말이 아니더라도 아슬아슬하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코맥 매카시#책#정글사회#로드#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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