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사라져가는 독서세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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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하나가 세대를 대표하는 드문 경우로 ‘학원’(1952∼1979년)이 있다.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1938년생)는 “많은 청소년들이 지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학원’에서 얻었다”고 회고한다. 시인 정호승(1950년생)은 중학생 때 학원문학상 우수상을 받았고 고교 1학년과 3학년 때도 우수상과 최우수상을 탔다.

‘학원’에 글을 발표하거나 학원문학상을 수상했거나 ‘학원’을 읽으며 문학적 감수성과 교양을 키운 작가들은 이루 다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1954년 제1회 학원문학상 수상자 이제하, 황동규, 마종기를 필두로 이청준, 조세희, 황석영, 최인호, 김원일, 문정희, 김병익, 김주영, 전상국, 김승옥, 황지우 등등. 1954년 8월호는 8만 부를 발행했는데, 당시 대표적 일간지의 발행부수를 상회하는 정도였다.

자유교양추진회와 동아일보사 공동 주최로 1968년 11월 23일 제1회 전국자유교양대회가 열렸다. 대회 목적은 ‘고전을 통한 교양의 함양’이었다. 고등부 지정도서는 ‘삼국유사’ 일부와 ‘택리지’, 대학부 지정도서는 ‘논어’, ‘맹자’,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이었다. 저술가 황광우(1958년생)는 “자유교양대회를 위하여 ‘삼국유사’, ‘신곡’,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등을 읽었는데 그렇게 어설프게나마 고전을 읽은 기억이 참 좋았다”고 말한다.

작가 장정일(1962년생)의 중학생 때 독학 문학수업은 삼중당문고 200여 권 독파였다. 문화평론가 정윤수(1966년생)는 고교 시절 “헌책방에 일동 기립하고 있는 삼중당문고 한 권을 왕복 버스비로 살 수 있었기에 버스를 타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잡지 ‘학원’(1952년)과 자유교양대회(1968년), 삼중당문고(1975년)는 독서 세대론을 가능케 하는 계기들이다.

그 이후로는 어떤 독서 세대론이 가능할까? 공통의 독서 경험으로 한 세대가 누릴 수 있었던 교양의 폭과 깊이를 감안하면 ‘인간시장 세대’나 ‘해리 포터 세대’를 거론하긴 힘들다. 독서 세대론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책과 지식교양의 다변화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변화라는 것이 파편화와 같은 뜻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유통 수단이나 지불 수단이 되는 화폐를 통화(通貨)라 한다. 독서세대가 끊어진 시대와 사회는 공론 형성의 수단이 되는 지식통화가 증발한 시대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지식 기반이 허약해진 사회라는 말이다. 지식정보사회는 초고속 정보통신망과 같은 뜻이 결코 아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독서#문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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