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영웅담 대신 눈물… 참전 여성들이 말하는 전쟁의 민낯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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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은 게 더 끔찍하거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문학동네·2015) 》

“(전쟁이 난) 그때 다들 열여섯, 열일곱 그랬거든.”

10대 후반의 소녀들은 치마와 구두 대신 군복과 군화로 몸을 감쌌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뚫고 살아남았지만, 승리자 남성들은 그녀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영웅담과 숭고한 희생정신 대신 두려움과 눈물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제 주름살과 흰머리가 늘어난 그녀들은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아무도 듣질 않았지. 그래서 입을 다물어 버린 거야…”라고 힘겹게 읊조렸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구소련 여성 200여 명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의 고통은 말줄임표가 대신했다. 이들을 힘들게 한 건 전쟁통에서 보고 겪은 비인간적 상황만은 아니다. “이날들만 견뎌 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것”이란 믿음이 깨지면서 참전 여성들의 삶은 더 힘겨웠다.

작가는 전쟁의 민얼굴은 인간성 훼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또한 전쟁에 마침표는 없다고 말한다. 총을 쏘거나 폭탄을 던져 사람을 죽이는 행동이 끝났지만, 여성들은 트라우마와 주변의 시선과 계속 싸웠다. 대중이 영웅담에 취해 있는 동안 이들은 침묵 속에서 사람을 죽이고 가족을 잃은 고통과 싸웠고,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 버렸다”는 이들의 회한은 같은 시기 러시아의 반대편 동아시아의 다른 소녀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들도 전쟁이 끝난 뒤 수십 년간 입을 다물고 살았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을 터뜨렸을 10대 소녀들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끌려다녔다. 누군가는 지난해 위안부 협상 타결로 모든 게 종결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당사자들의 전쟁에는 마침표가 없을 것이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여성#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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