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03>공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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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일 ―임강빈(1931∼ )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누가 찾아올 것 같아
자꾸 밖을 내다본다
우편함에는
공과금 고지서 혼자 누워 있다
이런 날엔 전화벨도 없다
한 점 구름 없이
하늘마저 비어 있다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랴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
반갑다고 연신 아는 체한다
그래그래 알았다
오늘은 완전 공일이다


공일(空日)은 휴일, 곧 쉬는 날이다. 전에는 일요일 하루가 공일이었지만 주 5일 근무가 대세인 요즘은 토요일도 공일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주일에 이틀 공일도 짧게만 느껴질 것이다. 밀린 잠 벌충하랴, 데이트하랴, 혹은 가족에게 봉사하랴, 거기에 더해 정신과 체력을 충전하고자 바쁜 여가를 보내다 보면 시간이 후딱 갈 것이다. ‘인생은 무료하면 길고 충실하면 짧다’고 독일 시인 실러가 말했다지. 싱겁기도! 하나 마나 한 말인 만큼 맞는 말씀이다. 누구 입에서 처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싱겁지 않게 가슴을 치는 말이 떠오른다. ‘하루는 길고 일생은 짧다.’

‘백목련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 꽃 진 지 하루 이틀 아니련만 ‘백목련 자리’에 유독 가슴 허해지는 화자, ‘누가 찾아올 것 같아/자꾸 밖을 내다본’단다. 평일에도 배달되는 우편물이라고는 공과금 고지서요, 전화벨을 울리는 건 마케팅 전화이거늘 오늘은 공일, 아무도 화자를 찾지 않는다. ‘한 점 구름 없이/하늘마저 비어 있다’, 화자의 마음 상태는 가문 봄날의 공기처럼 촉촉함과는 거리가 멀다. 화자의 마음을 설렘과 기대로 그윽이 채워주던 봄의 생기는 꽃들과 함께 지고 여름을 향해 가는 긴긴 낮의 아무 자극 없는, 권태롭고 막막한 공일. ‘답답한 이런 날이 또 있으리’! 누구라도 반갑겠지만 화자가 정말 애타게 기다리는 건 시심(詩心)이리라. 세상에서 잊힌 듯 외롭고 답답해하는 화자는 ‘마당 한 구석에 노란 민들레’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홀연히 날아와 홀연히 핀, 홀연히 떠나갈 노란 민들레, 그것이 인생이거늘. 우리 비자꾸나, 비우자꾸나! ‘오늘은 완전 공일’!

황인숙 시인
#공일#임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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