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86>반짝반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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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임경섭(1981∼ )

무츠키가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가을이었고
달이 환한 밤이었다
무츠키는 부모와 함께
비탈진 솔숲 사잇길을 걷고 있었다
한손으로는 어머니의 검지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중지와 약지 사이에
잠든 잠자리의 날개를 끼워 든 채
무츠키는 울창하게 웃자란 낙엽송 가지 사이로
부서진 달빛을 바라보면서
부모를 따라 걷고 있었다
내리막이 시작되자 달빛 대신 여러 채의
다락이 있는 집들이 뿜는 희미한 불빛이
별자리처럼 흔들렸다 무츠키가 달빛을 놓치고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릴 즈음이었을까
무츠키의 머리 위로 털 한 뭉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무츠키의 부모는 허리를 굽혀
자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털이 아니었다
무츠키의 부모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것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츠키의 어머니는 혼신의 힘으로 팔을 휘둘러
자식의 머리통을 휘갈겼고
무츠키의 아버지는 사력을 다해 두 발로
바닥에 떨어진 송충이를 여러 차례 짓이겼다
무츠키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츠키의 부모는 흉측한 벌레로부터
자식을 구해낸 것에 안도했지만
무츠키는 달랐다
그는 부모가 징그럽다고 하는 것이 왜
징그러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을 때리고 밀치면서까지 고요를 짓밟아버린
부모를 언제까지 미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 식구가 지나간 자리 위로
울퉁불퉁한 비탈길이 환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내 기억의 맨 처음에는 전차 바닥이 있다. 동행이었을 어른도, 전차 안 풍경도 떠오르지 않고, 사람이 빠질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컴컴하게 뚫려 있는 전차 바닥만 떠오른다. 실제로는 그렇게 큰 구멍이 아니었을 테다. 너덧 살 아이의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의 최초 기억은 대개 너덧 살쯤에 있을 테다. 그 전에는 고양이나 강아지가 가짐 직한 존재감으로 ‘현재’를 살 테다. 제가 겪는 일의 서사적 얼개를 파악하거나 선악을 판단하는 일 없이, 그러나 순간순간 고통받으며 행복해하며 무서워하거나 호오를 느끼며.

화창한 가을날 소풍을 갔던 일가족이 솔숲 사이를 걸어 귀가하는 ‘달이 환한 밤’이다. 평화롭고 행복한 이 하루는 주인공 무츠키가 ‘다섯 살 되던 해’ 이전의 ‘고요’한 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부모님은 기억도 못할 송충이로 인한 에피소드가 무츠키에게는 부모님의 사랑과 옳음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간 ‘날벼락과도 같은 일’. 다섯 살,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 그 두뇌는 인지(人智)의 미개지이지만 어렴풋하게든 선명하게든 새겨지는 영상이 있어 언제라도 심판할 테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이야기에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자주 ‘모기 잡는 데 도끼 휘두르는’ 식으로 폭력적이라는 알레고리가 담겼다.

황인숙 시인
#반짝반짝#임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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