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오코노기 마사오]전시 동원의 기억과 한일 관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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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동서대 석좌교수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동서대 석좌교수
8월 15일은 일본에서 ‘종전(終戰)’기념일이라고 불린다.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규정한 포츠담선언을 하루 전에 수락했지만 일왕이 그 사실을 국민에게 알린 것은 15일이었다. 한국에선 해방 혹은 광복절이다. 하루 뒤인 16일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군중의 모습이 그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하지만 최근 뒤늦게 읽은 서적 ‘건국 60년의 재인식’ 속에 있는 문장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전상인 교수에 따르면 종전 직후, 즉 8월 15일 보통 한국인은 독립했다거나 해방됐다는 감격보다 ‘아,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을 더 크게 느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아, 이제는 징용 안 가도 되겠다, 솔뿌리 캐지 않아도 되겠다, 방공호 파지 않아도 되겠다’, ‘이제 전장에 안 끌려가는구나’와 같은 기쁨이었다.

분명 한국도 ‘종전’을 경험했다. 하지만 전투행위의 종결 이상의 의미였다. 징병과 징용, 즉 광범위하고 가혹한 전시 동원의 종언이기도 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통계에 따르면 종전 때까지 조선인의 군인 군속은 24만2000명에 이르고 그중 2만2000명이 사망 혹은 행방불명(미귀환)됐다. 훈련을 끝낸 이의 상당수는 이오(硫黃) 섬을 시작으로 태평양의 격전지에 파견됐다.

하지만 사할린, 일본 본토, 태평양 제도의 광산, 공장, 군사시설 등에 동원돼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중노동에 종사한 조선인 노동자의 수는 더 많다. 군인의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예가 1944년 11월에 착공한 나가노(長野) 현 ‘마쓰시로(松代) 대본영’이다. 본토 결전용으로 준비된 지하사령부 건설을 위해 징용된 노동자는 당초 조선인 7000명, 일본인 3000명이었고, 얼마 안 있어 각 1만 명으로 확대됐다.

‘여자정신대’도 전시 동원의 한 종류였다. 조선에서도 1944년 3월부터 관 알선의 ‘여자(근로) 정신대’가 징모(徵募)됐는데 당초부터 “정신대로 가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선 미혼 여성은 바깥 노동을 기피했다. 징모를 피하기 위해 일찍 결혼하거나 도망가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혹은 일할 필요가 없는데도 초등학교 교원이 되는 상류층 자제도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강제연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논하려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일본군과 행동을 함께했기 때문에 징용이든 모집이든 위안부 또한 전시 동원의 대상이었음은 틀림없었다.

앞부분에 지적한 것처럼 조선인에게는 전쟁이 광범위하고 잔혹한 전시 동원이었음을 고려하면 한국인이 ‘위안부는 강제적으로 연행됐다’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전 위안부에 의한 증언과 소송에 의해 강제연행은 확고부동한 ‘사실’이 됐다.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을 듣고 이 문제는 이미 독도-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 문제와 같이 해결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일의 인식 차원에서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문제를 똑바로 해결할 때… 내년 한일 수교 50주년도 양 국민이 마음으로부터 함께 축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어떻게 될까.

11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이 회담해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도-다케시마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정면 돌파가 되지 않으면 주변에서 우회적으로 접근해 현안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화해라는 것은 타협과 이해에서부터 구축된다.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동서대 석좌교수
#8월 15일#독립#전쟁#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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