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멈출 수 없는 ‘크레이지 트레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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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0일 일요일 흐림. 탈선.
#119 Ozzy Osbourne ‘Crazy Train’ (1980년)

9일 밤 서울월드컵경기장 특설무대에 선 오지 오즈번. 표정만 봐도 미친 사람 같다. 현대카드 제공
9일 밤 서울월드컵경기장 특설무대에 선 오지 오즈번. 표정만 봐도 미친 사람 같다. 현대카드 제공
지난 밤, 악마들과 사투를 벌였다. 두 번째 지옥의 내부계단을 오르며 적의 매복으로 가득한 마지막 방어벽을 뚫는 데 몇 차례 실패한 뒤 난 기막힌 복안을 떠올렸고, 결국 승리의 고지에서 ‘꿀잼’(꿀처럼 달콤한 재미를 뜻하는 속어)을 맛봤다. 이 모든 노고가 ‘블랙 캔디 데스 메탈’이란 가상현실 게임의 일부이고 그 게임마저 내 꿈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전투의 공포에 떨며 등줄기로 흘린 땀이 어쩐지 잘 식더니만 풍기 인견 침구 덕이었나. 이게 무슨 개꿈이야.

어젯밤 서울 상암동에서 영국 출신 록 가수 오지 오즈번(66·본명 존 마이클 오즈번) 콘서트를 처음 봤다. 헤비메탈의 조상 격인 영국 밴드 블랙 사바스의 보컬이 12년 만에 펼친 내한 무대. 날카로운 고음도, 으르렁대는 중저음도 아닌 어중간한 오즈번의 보컬을 원래 좋아하진 않았는데 그의 진가를 이번에 확인했다.

힙합 듀오 리쌍의 멤버 길이 내게 “녹음할 때 보컬에 카리스마를 부여하기 위해 화성을 미묘하게 중첩시킨다”는 자신의 비법을 귀띔했었는데 오즈번은 그런 게 아예 성대에 탑재돼 있는 듯했다. 그가 역할모델 삼은 오즈의 마법사처럼, 오즈번의 목 뒤에서 나온 보이지 않는 전선이 무대 뒤로 뻗쳐 비밀의 음향 기계와 연결이라도 돼 있는 듯. 조금만 건드려도 배음(倍音)을 토해낼 듯 팽팽한, 전기기타 줄 같은 성대.

넓은 흰자와 반짝이는 동공, 스모키 화장으로 강조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잘 깜빡이지 않는 능력도 대단했다. 좀비처럼 구부정한 종종걸음으로 양동이를 가져와 객석에 물을 끼얹고 살수기로 물을 분사하며 바보처럼 웃었다. 무대 위에서 박쥐를 산 채로 물어뜯은 기행으로 유명한 오즈번이 채식주의자였대도 으스스했을 걸.

오즈번은 ‘바크 앳 더 문’ ‘미스터 크롤리’ ‘아이 돈트 노’ 같은 솔로 대표 곡은 물론이고 블랙 사바스 시절 명곡 ‘페어리스 웨어 부츠’ ‘워 피그스’ ‘아이언 맨’ ‘파라노이드’까지 90분간 쏟아냈다.

공연 뒤 친한 형과 오즈번의 건재에 대해 얘기했다. 스물일곱 살에 무대 위에서 죽는 게 꿈이었지만 매일 비타민까지 챙겨먹으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함께 웃었다.

오즈번의 ‘크레이지 트레인’은 핵전쟁으로 인한 절멸의 공포가 대중을 지배한 냉전체제를 멈출 수 없는 기차에 빗댄 곡이다. 우린 어떤 공포의 끈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까. 노란 길 밖에는 뭐가 있나.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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