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57>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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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
―길상호(1973∼ )

삼성시장 골목 끝 지하도
너는 웅크리고 누워 있었지
장도리로 빼낸 못처럼
구부러진 등에
녹이 슬어도 가시지 않는
통증, 을 소주와 섞어 마시며
중얼거리던 누더기 사내,
네가 박혀 있던 벽은
꽃무늬가 퍽 아름다웠다고 했지
뽑히면서 흠집을 냈지만
시들지 않던 꽃,
거기 향기를 심어주는 게
너의 평생 꿈이었다고
깨진 시멘트벽처럼 웃을 때
머리카락 사이로 선명하게
찍혀 있던 망치 자국,
지하도는 네가 뽑힌 구멍처럼
시큼한 녹 냄새가 났지


길상호 시집 ‘모르는 척’(천년의시작)에서 옮겼다. 시집의 화자는 대도시 서울의 구석진 곳에서 죄 지은 듯 겁먹은 듯 몸을 사리고 있는 존재들을 ‘모르는 척’ 앓는다. 자기를 방기하거나 유기된 사람과 동물과 사물의 그 눈물겨운 허름함을 어찌 아는 척할 것인가. 예민한 눈과 여린 심성의 화자는 그들의 상처를, 가풀막진 사연을 몸으로 읽고 앓는 것이다.

‘누더기 사내’가 몸도 가누지 못하게 취해서 웅크리고 누운 채 소주를 마시고 있다니, 통행인이 드물고 어둠침침한 지하도일 테다. 대개의 사람은 못 볼 걸 본 듯이 걸음을 재촉할 텐데, 화자는 지나쳐 가지 않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았던가 보다. 도움이 필요한 위급사태가 아닐까 걱정됐을지도 모른다. 아마 처음으로 따뜻한 사람의 기척을 느낀 ‘누더기 사내’는 제가 ‘꽃무늬가 퍽 아름다운 벽’이 있던 방에서 살았다고, 그것이 꿈이었을까 싶게 자기도 잊고 있었던 그 옛날의 이야기를 중얼거린다. 그 방에는 ‘꽃무늬가 퍽 아름다운’ 벽지를 골랐을 여인도 있었을 테다. 그가 ‘거기 향기를 심어주는 게/평생 꿈이었다고/깨진 시멘트벽처럼 웃을 때’, 그 방 벽지 너머 시멘트벽처럼 지하도 시멘트벽처럼, 화자의 가슴도 깨어진다. 어떤 삶의 장도리가 사내를 그 벽에서 잡아 뽑았을까.

화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내, 노숙인 ‘누더기 사내’를 가장 친근한 이인칭 대명사 ‘너’라고 부른다. 사람과 삶에 대한 화자의 깊은 이해와 직정(直情)의 발로일 테다. 남의 일 같지가 않구나. 비정한 장도리가 반드시 피해가리라고 누군들 장담할 수 있을까.

황인숙 시인
#구부러진상처에게듣다#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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