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넘어짐에 대하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넘어짐에 대하여’
정호승(1950∼)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 이상 검은 물 속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어떤 때는 물을 짚고 일어서다가
그만 물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예 물속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수련이 손을 뻗으면 수련의 손을 잡고
물고기들이 앞장서면 푸른 물고기의 길을 따라간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 세운다 할지라도      


아오노 후미아키 씨의 불탑.
아오노 후미아키 씨의 불탑.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가르침이다. 한데 정호승 시인은 유독 자신은 넘어져도 번번이 물 위에 넘어지는 바람에 땅을 짚고 일어서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들려준다. 그만큼 고난의 시간을 보냈으나 물의 바닥이라도 짚고 다시 설 수 있으니 감사하다는 시인. 그가 쓴 ‘넘어짐에 대하여’는 상처와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를 진솔하게 고백한 작품이다.

긴 연휴의 끝자락에 자리한 부처님오신날은 불가(佛家)의 최대 명절이지만 올해는 추모 분위기 속에 조용히 지나갔다. 석탄일을 보내며 ‘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따르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會者定離 去者必返)’는 법화경 구절을 되새겨본다. 요즘 같은 때라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도 가슴에 박히는 문구일 것이다.

서울 삼청로의 한 갤러리에 발걸음이 끌린 것도 생사의 연결고리를 함축한 전시 제목 때문이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가 덮친 센다이에 사는 아오노 후미아키 작가의 ‘환생, 쓰나미의 기억’전이다. 그는 새것을 만들기보다 고치고 복원하는 데 관심을 둔다. 재난과 폐허의 땅에 흩어진 잔해를 거두어 새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사물의 윤회를 나타낸다. 해일이 쓸고 간 바닷가에서 주워온 페트병과 버려진 책들로 만든 불탑(佛塔)도 추모와 환생을 상징한다. 조각조각 고통의 흔적을 쌓아올린 탑은 볼품없지만 거대한 상실의 아픔을 위로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자는 메시지만큼은 묵직하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NHK 아나운서는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탄식했다. 예측 불가의 재앙이 평온한 일상을 단숨에 무너뜨린 현실, 일본 트위터에선 나라 이름을 ‘흔들흔들 제국’으로 고치자는 블랙유머도 유행했다고 한다. 그때 그들이 느낀 무기력과 불안감이 지금 우리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온 천지에 피고 지고 피고 지는 꽃들이 자연의 순리, 생명의 순환을 알려주듯 환생의 꿈에라도 마음 한 자락 기대고 싶다. 떠난다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깊은 물속으로 곤두박질친 우리 아이들은 언제나 물을 짚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봄날이 간다. 속절없이.

고미석 mskoh119@donga.com
#넘어짐에 대하여#정호승#상처#고통#환생#윤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