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배극인]일본 바라보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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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가끔 한국 지인들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일본에 우경화 바람과 혐한(嫌韓) 감정이 거세다는데 괜찮으냐”고 묻는다. 실제로 도쿄(東京)에서 생활하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적지 않다. 출퇴근길에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 광고판의 한국과 중국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주간지 제목이 시민들의 눈길을 잡는다. 서점에는 혐한 서적이 넘쳐나 전용 코너까지 등장했다. 대다수 언론과 달리 무료 기사를 쏟아내는 일부 극우 언론의 논조는 인터넷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인터넷 세대인 일본의 20대 유권자 24%는 9일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항공자위대 출신의 우익 후보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를 지지했다. 일본은 현재 한국 중국과 전시 상황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일상에서 혐한 반한 감정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때는 거의 없다. 도쿄 한류 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의 반한시위는 요즘 사라졌다. 많은 일본인들은 여전히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하고 있다. 얼마 전 일본인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한 대학 교수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라는 단어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원래 있던 우익세력이 표면화된 것뿐이다. 물론 영향이 없지 않지만 많은 국민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지지하는 건 아베노믹스 때문이다. ‘잃어버린 20년’간 앞이 안보이던 경제가 어쨌든 지금 처음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지 않나. 일본 국민에겐 결국 경제가 모든 것이라는 얘기다.”

또 다른 교수는 사회가 우경화됐다기보다 여유를 잃었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경제에 모든 것을 걸어 성공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출구 없는 장기 불황이 시작됐다. 2010년에는 세계경제 2위 자리를 중국에 내줬다. 마침 그해 말 센카쿠(尖閣) 열도 인근 해역에서 중국 어선이 일본 경비선을 들이받았는데 정부는 무기력했다. 일본의 간판 전자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삼성전자에 패퇴했다. 이듬해에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겹쳤다. 일본은 뭐든지 당하고만 있다는 인식이 특히 젊은층 사이에 확산됐다. 예전 같으면 적당히 넘어갈 일도 사사건건 받아치게 됐다. 한일 관계가 ‘아이들 싸움’처럼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 언론인은 ‘20대 우경화’도 같은 맥락이라고 거들었다. “지금 20대는 태어날 때부터 불황이었다. 세대 간, 계층 간 ‘격차 사회’도 심해졌다. 재정파탄 연금파탄 등 살벌한 단어가 이들 세대를 옥죄고 있다. 이번에 우익 후보가 큰 지지를 얻은 것은 이들 ‘불우 세대’의 마음을 적절히 대변했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에 맞서 강한 일본을 만들자는 공약도 먹혀들었지만 청년 고용에 관심을 기울이고 젊은 세대에 재분배를 주장하는 등 당근을 제시했다.”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의 입에서 결국 일본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고 지금은 ‘아베노믹스’라는 모르핀 주사를 맞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아베노믹스의 거품이 터지면 일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한숨도 들렸다.

일본의 사정을 이해해 달라는 말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일본 사회의 움직임을 몽땅 ‘우경화’라는 단어 하나로만 재단하는 것도 상책은 아닐 듯싶다. 어차피 이사할 수 없는 이웃이라면 속사정을 좀 더 헤아려볼 필요도 있다는 얘기다. 따질 땐 따지더라도 때로는 우리가 여유를 보이며 관계를 리드하는 건 어떨까. ‘서로를 복안(複眼·곤충의 겹눈)으로 바라보자.’ 한일 관계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선배 세대가 내놓은 해법이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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