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이진녕]김황식 前 국무총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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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권한 너무 막강… 총리와 권한 재분배 바람직”

“아직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김황식 전 총리는 대학이나 비영리 단체 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아직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김황식 전 총리는 대학이나 비영리 단체 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대통령제하에서 국무총리의 존재는 애매하다. 행정부의 2인자로 겉모양은 화려해 보이지만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곡예사 같은 신세다. 대통령을 가릴 정도로 너무 돋보여서도 안 되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돼서도 안 된다. 그런 역할을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오래(2년 4개월) 했고, 비교적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황식 전 총리(65)를 8일 만났다. 그는 총리 퇴임 후 독일로 가 6개월가량 머물다 이달 1일 귀국했다.

서울시장 출마? 현재로선 생각 없어

―귀국할 때부터 내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지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선출직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다. 40년 공직을 마친 사람으로서 어떤 방법으로든 나라에 기여해야 되겠다는 책무는 느끼지만 그것을 선출직을 통해 하겠다는 생각은 현재로선 갖고 있지 않다.”

―여권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적극 권유한다면….

“만에 하나 그런 요구가 있다면 그때 가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생각해보겠지만, 기본적으로 선출직을 통해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현재로선 안 하고 있다. 그런 제의를 받은 적도 없다.”

―혹시 대통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웃으면서)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건가.”

‘현재로선’ ‘그때 가서’라는 표현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부정에 가까웠다. 그래도 사람의 훗일을 누가 알겠는가. 그가 설혹 나중에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다 한들 이 정도의 발언으로 책잡힐 것 같지는 않다.

―어떤 계기로 독일에 갔고, 무엇을 했나.

“1978년 젊은 판사 시절에 1년 4개월 동안 독일에서 연수한 적이 있다. 그때 초청했던 대학이 다시 초청해 베를린자유대에 적을 두고 독일의 통일 정치 복지 산업 등 여러 분야에 대해 공부했다. 대학이나 경제단체 포럼 등에 초청받아 10여 차례 특강도 했다. 독일 정치인과 관료, 우리 교포들도 많이 만났다.”

―인상 깊었던 일을 소개한다면….

“우리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시스템이 잘 짜여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국민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 부러웠다. 9월 22일 총선에서 우파인 기민당이 압승했지만 좌파로 분류되는 사민당, 녹색당, 좌익당이 오히려 과반을 차지했다. 좌파 정당들이 연합하면 정부를 구성할 수 있고, 기민당이 다른 정당에서 의원 5명만 영입하면 단독 정부 구성이 가능한데 어느 쪽도 그런 생각을 안 하더라. 제1당인 기민당과 제2당인 사민당이 연합정부를 구성하는 대연정을 모색하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문화, 품격 있는 정치문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원칙지키는 獨정치문화 부러워

―민주당의 대선 경선 후보 손학규, 김두관 씨와 체류 기간이 겹치던데 만난 적 있나.

“만나서 식사도 같이하고 잘 지냈다. 두 분 다 총리 재임 시에 친분이 있었다. 한국 정치에 대해선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어느 한국 대학 교수가 나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그림 참 좋다’라고 하더라.”

―상대적으로 성공한 총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결이 뭔가.

“고마운 일이지만 특별히 그럴 만한 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성경 말씀 가운데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높은 곳에 뜻을 두지 말고 항상 낮은 곳에 처하라’는 구절을 제일 좋아한다. 또한 온유 겸손 절제를 제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런 것들을 국민이 좋게 봐주신 것 같다.”

―총리 재임 시 업무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과 마찰은 없었나.

“그런 적은 없다. 대통령이 굉장히 신뢰해줬고, 검경 수사권 같은 갈등 과제를 비롯해 많은 일을 총리실에 맡겨줬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워낙 막강하기에 총리가 소극적 수동적 역할에 그치면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 쉽다. 현대 행정은 너무 복잡다기해서 대통령 혼자 다 챙길 수 없고,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다. 총리가 보다 적극적 능동적 선제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에게 분산하고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국가운영에서 내치와 외치를 분명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권한 재분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막강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프랑스처럼 대통령은 국민이, 총리는 국회에서 뽑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독일은 대통령과 총리는 물론이고 총리와 장관 사이에도 권한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다. 5년 단임제는 장기집권의 폐해를 막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된 것인데 역사적인 소명을 다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을 수행하고 또 중간에 평가를 받는다는 차원에서 4년 중임제가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김 전 총리는 대법관과 감사원장도 역임했다. 현실 문제에 대한 그의 진단과 해법이 궁금했다.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독일도 과거 인권을 말살했던 나치정당을 그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정당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서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통해 사회개혁을 하고자 하는 정당에 대해 해산을 명령한 적이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주권재민, 의회제도, 기본권 보장 같은 것은 우리 사회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적 가치다. 법무부에서 심도 있게 검토해서 해산 청구를 했을 것이다. 통진당의 정강정책과 활동 등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뭐라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려보는 것이 도리라고 본다.”

‘통진당 해산’ 헌재결정 기다려야

―우리 사회는 좌우 또는 진보-보수 간 대립이 매우 심하다. 치유 방법은 없나.

“우리 사회의 대립은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데다 단기간의 압축성장으로 사회 부조화 현상이 크고, 머리 위에 이상하고 특수한 북한 정권이 존재한다는 복합적 요인 때문이라고 본다. 극단적인 것은 빼고 좌나 우, 진보나 보수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느냐는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보수와 진보, 모두가 서로 적이 아니라 동지라는 생각을 갖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공통분모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점이 뭐라고 보나.

“정치가 정파적 이해 때문에 보수나 진보의 이념을 이용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정치인은 정파적 이익보다는 국익을 우선시하는 철저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하고, 선악의 이분법이 아닌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과거와 같은 과당 경쟁이나 투쟁, 성과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 성숙한 선진국으로 가려면 좀더 여유를 갖고 너그러워야 하며, 기초를 튼튼히 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정치인과 사회지도층이 모범을 보이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국민을 설득하고 끌고 가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판사는 객관적 양심으로 판결해야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람직한 국가지도자상(像)은….

“국가지도자가 되려면 국민에게 꿈(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능력, 소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혼자 독불장군 식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과 어깨동무를 해서 함께 가고 공감을 얻어나가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 사회 통념에 배치되는 판결들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법관의 올바른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는가.

“판사가 재판의 준거로 삼아야 할 양심은 판사 개개인의 주관적인 양심이 아니라 사회공동체의 객관적 이성으로서의 양심을 의미한다. 혹여 판사가 개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판을 이용하는 건 절대 용납 안 되지만, 설사 그런 판사가 있다 해도 3심제가 있기 때문에 정리가 될 것으로 본다. 법관의 재판은 가능한 한 존중해주고 기다려주는 게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물론 판사는 객관적인 양심을 갖고 그 기준에 따라 재판을 해야 한다. 자신의 주관적 생각에 따라 판결한다면 그건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 돼버린다.”

김 전 총리는 소통에 유별난 애착을 갖고 있다. 광주지법원장 시절, 처음 기관장이 되니 사명감도 생기고 자신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면 도움도 될 듯해 법원 내부통신망을 통해 ‘지산통신’이라는 이름으로 1주일에 한 번 정도 모든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냈는데 의외로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돼 감사원장 시절엔 계간지에 글을 쓰고, 총리 시절엔 연필로 쓴 글을 스캔해 총리실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독일 체류 중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많은 글을 남겼다.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 무엇을 할지 정한 것은 없다. 대학이라든지 비영리 공익단체 같은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해 와서 일해 달라고 하면 상황을 봐가면서 할 생각이다.”

새로 인생을 시작한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냐고 묻자 김 전 총리는 “철학이나 신학, 역사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학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고 답변했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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