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14> MB정권의 76학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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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任-李-金 76동기의 갈등과 협력, 그 중심엔 SD가…

2010년 11월 29일 이명박(MB) 대통령의 연평도 피격사태 특별담화문 발표 회견장으로 들어가는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김두우 기획관리실장. 서울대 76학번 동기인 두 사람은 이명박 정부 중기(中期)의 청와대를 이끌며 호흡을 맞췄다. 역시 MB의 ‘76학번 참모’였지만 두 사람과 불편한 관계였던 이동관 전 홍보수석비서관은 청와대를 떠나 있던 때였다. 동아일보DB
2010년 11월 29일 이명박(MB) 대통령의 연평도 피격사태 특별담화문 발표 회견장으로 들어가는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김두우 기획관리실장. 서울대 76학번 동기인 두 사람은 이명박 정부 중기(中期)의 청와대를 이끌며 호흡을 맞췄다. 역시 MB의 ‘76학번 참모’였지만 두 사람과 불편한 관계였던 이동관 전 홍보수석비서관은 청와대를 떠나 있던 때였다. 동아일보DB
이명박(MB) 정권의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유난히 76학번들이 눈에 많이 띈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대 76학번 동기들인 정두언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그리고 홍보수석비서관을 차례로 지낸 이동관 김두우의 협력과 갈등은 늘 은밀한 화제였다. 묘하게도 정두언과 임태희는 서울대 상대 출신에 행시 24회 동기였고, 이동관과 김두우는 각각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출신의 정치학과 동기였다.

그들이 모신 대통령은 6·3세대였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해 궐기했던 6·3세대. 이후 민주화에 헌신한 멤버들도 있지만 다수는 산업화의 역군이 됐다. MB는 후자의 상징이었다. 초기에 부진하던 박정희식 경제개발도 1966년부터는 10% 이상 고도성장의 시대를 연다.

76학번들이 입학하던 1976년은 현대자동차가 포니의 판매를 시작한 해였다. ‘마이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76학번은 그러니까 폭압적인 유신말기체제에 신음하면서도 산업화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한 세대였다. 노무현의 386세대와 같이 ‘단일 혹은 이념 코드’로 설명할 수 없는 세대였다.

그런 점에서는 6·3학생운동의 주역이자 산업화의 간판스타인 MB도 마찬가지였다. 6·3세대 대통령과 76학번 참모들. 특히 50대 초반의 76학번 참모들은 ‘올드 보이’들이 많은 MB 정권에서 무엇을 꿈꾸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무엇을 꿈꾸기도 전에 권력투쟁의 직·간접적인 당사자가 되고 만다.

18대 총선 공천심사가 한창이던 2008년 3월, 정두언을 필두로 한 한나라당 소장파 55명이 이상득(SD) 국회부의장의 불출마를 압박하고 있던 때였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이동관 대변인에게 ‘55인 거사(擧事)’에 대한 코멘트를 요구했다.

“충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문제 제기 방식이 거칠고 적절치 않다.” 물론 이동관의 실명이 아니라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코멘트로 보도됐다.

그날 저녁. 이동관은 식사 도중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다. 인간이 그러면 안 된다.’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뒤늦게 경선 캠프에 합류한 이동관이 인수위 대변인을 맡게 된 데는 ‘실세’ 정두언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정두언은 서운함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동관이 ‘(친구로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참모로서 한 얘기’라고 다독였지만 정두언은 풀지 않았다. 기획조정비서관으로 있던 SD의 심복 박영준이 “들었어요? 정두언이 요즘 기자들에게 이 선배를 ‘간신’이라고 씹는답니다”라고 귀띔해줄 정도였다. 제갈공명이 조조를 치기 위해 주유를 격분시키는, 삼국지 적벽대전의 그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연상케 하는 말이었지만 이동관도 발끈했다.

보다 못한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강남의 어느 카페에서 화해의 술자리를 마련했다. 한국일보 출신으로 경선 캠프인 안국포럼 메시지팀장으로 활약했던 신재민은 이동관의 정치학과 1년 후배이기도 했다.

이동관=
“나를 간신이라고 욕하고 다닌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정두언=“욕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동관=“너는 정치하는 사람이고, 나는 대통령 참모 아니냐? ‘큰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그 정도밖에 안 되냐? 나는 대통령 모시느라 정신이 없다.”

정두언=“네가 지금 잘 모시고 있는 거냐? 바른 소리를 해야지!”

이동관=“나름대로 바른 소리 하고 있다. 네가 나 같은 사람까지 적으로 만들면서 무슨 정치를 하겠다는 거냐.”

‘MB 정권의 설계사’로 불리던 정두언은 이미 세(勢)를 잃고 있었다. ‘왕의 남자’인 이재오 의원까지 18대 총선에서 고배를 들자 MB 정권의 권력지형은 급격하게 ‘형님(SD)’ 쪽으로 기울었다.

SD는 임태희를 아꼈다. 임태희는 1980년대 중반 민정당 대표를 지낸 권익현의 사위였다. 권익현은 육사 11기로 전두환 노태우의 동기. 경남 산청 출신이지만 대구 능인고를 졸업한 ‘범(汎)TK’였다. SD도 ‘절반’은 육사 출신이다. 비록 자퇴하고 서울대 상대로 옮겼지만 그는 코오롱에 있을 때도 입교 동기생들인 육사 14기를 챙겼다.

임태희도 서울대 상대 출신이다. 그러니까 임태희는 SD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셈이었다. 게다가 유능하고 자기 절제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어른을 잘 모셨다.

이방호 전 사무총장의 기억. “(2007년 경선 때) 이재오와 내가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말 간곡하게 설득하고 다녔다. 그런데 임태희는 막판까지 요리조리 버티다가 (나나 이재오가 아니라) SD 쪽에 붙어서 들어왔다. 어느 날 SD한테 시급한 경선 상황을 보고하러 갔는데 안에 사람이 있다면서 안 나오더라. 비서도 평소와 달리 안에 누가 있는지 말을 안 하고…. 쪽지라도 집어넣으라고 방방 뛰니까 문을 열어 주는데 다른 사람은 없고 SD 혼자 있더라. 알고 보니 임태희를 화장실에 숨겨두고 문을 열어 준 거였다. 그 정도로 끼고 돌았다.”

막판에 합류했지만 임태희는 후보 비서실장, 당선인 비서실장,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노동부 장관, 대통령실장에 대북 특사 역할까지 MB 정권과 사실상 명운을 함께한다. 정책위의장 때부터 다듬어 온 ‘공정사회’ 구상을 MB 정부의 키워드로 만들어낸 주인공도 바로 임태희였다.

하지만 권부 내에서는 SD가 데리고 들어온 ‘범TK 데릴사위’로 비쳤다. 2010년 7월, 임태희가 제3기 청와대의 대통령실장으로 자리를 잡자 여권 인사들은 “SD계의 당청 장악이 완성됐다”고 판단했다. 한 달 전 지방선거 패배의 여파로 한나라당 사무총장까지 원희룡 의원으로 교체됐다. 원희룡은 그즈음 ‘SD 사람’으로 분류됐다.

신설된 메시지 기획관으로 있다가 이때 기획관리실장을 맡게 되는 김두우와 민정1비서관으로 있던 장다사로까지 감안하면 ‘SD계의 당청 장악’이란 얘기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김두우는 어찌됐건 TK이고, 장다사로는 세상이 다 아는 ‘(이상득) 부의장 사람’이었다. 장다사로는 임태희의 경동고 후배이기도 했다.

박영준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으로 있던 2009년 10월 몇몇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난번 청와대 개편으로 이동관 홍보수석에게 힘이 많이 실렸다고 하는데 꼭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중요한 포인트는 김두우 메시지 기획관이다. 메시지 기획관은 대통령과 매일 만나는 자리다. 청와대에선 누가 대통령을 매일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SD 직계인 박영준이 김두우를 ‘우리 편’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말이다. 2009년 6월 정두언을 비롯한 소장파 7인이 ‘만사형통(萬事兄通) SD’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고 나섰을 때 ‘2선 후퇴론’으로 SD를 설득한 사람은 김두우였다. 2008년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SD는 소장파의 퇴진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퇴진은 곧 정계 은퇴’라고 생각했다. 실제 소장파의 요구도 정계 은퇴 후 해외 체류였다.

메시지 기획관을 맡기 전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있던 김두우는 SD에게 “2선 후퇴라도 해야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우회로를 제시했다. 물론 MB도 받아들인 아이디어였다.

2009년 6월 3일 아침, SD는 안국포럼 출신의 친이(親李·친이명박) 직계 의원들을 불렀다. 정두언도 당연히 초청 멤버였다.

SD=“오늘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중대결심을 밝히려고 한다. 여러분이 요구하는 2선 후퇴를 받아들이겠다.”

정두언=“그것만으로는 진정성을 보일 수 없습니다. 당정청에서 의심받는 측근들까지 모두 함께 물러나야 합니다.”

SD=“(극도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합심해서 우리가 만든 대통령을 최선을 다해 보좌하자.”

정두언=“(탁자를 내려치며) 우리라고요? 난 한 번도 우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김두우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2선 후퇴’는 소장파의 예봉을 피하면서 SD를 구명(救命)하는 카드가 됐다.

그리고 정권재창출을 위해 박근혜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SD의 ‘친박 본색’까지 구명하는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또 하나. 76학번 네 사람의 권력좌표에도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네 사람은 SD와의 관계에 따라 협력보다는 갈등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
#이명박#이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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