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15> 친이(親李)의 4·27 분당 자폭(自爆)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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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섭 대신 정운찬 공천” 상처만 남긴 이재오의 헛발질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MB가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강재섭을 위로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웃고 있는 홍준표는 당시 원내대표. ‘정권을 창출한 당 대표’였던 강재섭은 내심 국무총리를 기대했으나 MB가 내놓은 제안은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강재섭은 “차라리 시골 교장이나 하겠다”며 이후 MB에게 등을 돌렸다. 동아일보DB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MB가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강재섭을 위로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웃고 있는 홍준표는 당시 원내대표. ‘정권을 창출한 당 대표’였던 강재섭은 내심 국무총리를 기대했으나 MB가 내놓은 제안은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강재섭은 “차라리 시골 교장이나 하겠다”며 이후 MB에게 등을 돌렸다. 동아일보DB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 “정운찬이 나오지 않겠다고 하면서 강재섭으로 (공천은) 끝난 거다. 당은 아무런 대책도, 전략도 없다. 이재오가 대단하다고 하는데 사고는 딱 중학생 수준이다. 분당을 공천 안 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정운찬) 밀어붙이고….”(2011년 3월 29일 한나라당 출입기자 정보보고)》

“그것 때문에 친이 쪽에서 (당신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

2011년 초 어느 날, 이명박 대통령(MB)은 임태희 대통령실장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4월 27일로 예정된 경기 성남시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공천 문제였다. MB 스스로 ‘친이(친이명박) 쪽’이라고 말한 건 이재오 특임장관이었다.

임태희는 강재섭 전 대표를 밀었다. 2005년 강재섭이 원내대표로 있을 때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아 한때 ‘강재섭 계보’로 통하기도 했지만, 임태희는 그보다 정치 도의상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재섭은 MB 정권 출범 이후 두 번이나 인사검증 동의서를 제출했다. 국회의원 5선에 당 대표를 지낸 강재섭에게 인사검증 동의서란 곧 ‘국무총리 후보’였다. 강재섭도 그렇게 생각했고, 임태희도 마찬가지였다. 임태희는 2010년 7월 대통령실장으로 임명된 뒤 MB에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다.

임태희=“총리도 안 시킬 거면서 인사검증 동의서까지 받은 건 좀 심했습니다.”

MB=“총리는 안 돼!”

임태희=“그러면 왜 검증을….”

MB=“임 실장이 만나서 오해를 풀어줘.”

그 얼마 후 임태희는 강재섭을 만났다. 강재섭은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지만 ‘총리의 꿈’은 이미 접고 있었다. 그 대신 다른 제안을 했다. “분당을 보궐선거에 나갈 예정이니 청와대에서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 임태희가 대통령실장으로 들어가면서 공석이 된 분당을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가 출마하겠다는 뜻이었다.(*이 대목에 관한 강재섭의 기억은 좀 다르다. 임태희가 먼저 권유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임태희는 강재섭을 밀면서 MB에게 이런 얘기까지 했다. “방해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총리도 안 시키는데 방해는 말이 안 됩니다. (정치인에게 그렇게) 척을 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MB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가 움직였다.

해가 바뀌어 4·27 재·보선을 앞둔 2011년 초 어느 날, 이재오는 정운찬 전 총리를 만난다. 정운찬은 2010년 7월 세종시 수정안 국회 부결에 따른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퇴한 뒤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재오=“분당을 선거에 출마하셔야죠!”

정운찬=“대통령의 뜻입니까?”

이재오=“그렇습니다.”

정운찬=“….”

사실 정운찬은 MB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여권에서 자신을 후보 경선 없이 전략 공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던 것. 아니나 다를까 당 지도부는 ‘정운찬 영입’ 카드로 발칵 뒤집혔다. 홍준표 최고위원은 “(세종시 수정안 실패 때문에) 문책으로 나가신 분이다”라고 했고, 정두언 최고위원도 “당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분을 새로 영입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재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해 2월 7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출마) 생각도 안 하고 있는 사람(정운찬)을 거론하고 있는데, 과거 밀실정치나 다름없다”고 반격했다. 그러면서 “나는 1996년 분당으로 이사 와 올해 15년째 살고 있다. 당선돼도 대표나 국회의장 자리에는 관심 없고 시켜 줘도 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려가 현실이 되자 정운찬은 3월 20일 “나는 한 번도 나간다고 한 적이 없다. 나갈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정운찬의 전언. “눈치를 보니 (대통령의 뜻이라는) 이재오의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더라. 당 최고위원들 중에서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거든. 결국 나가지 않기를 잘했던 거야.”

애초 정운찬 영입 카드는 이재오가 아닌 원희룡 사무총장의 아이디어였다. 안상수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된 2010년 7월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원희룡은 ‘경기의 강남’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텃밭에서 패배하면 사무총장 자리뿐만 아니라 곧바로 MB정부의 위기라고 생각했다. 특히 민주당에서는 손학규 대표의 차출설이 솔솔 나오고 있었다. 민주당이 손학규 카드를 꺼내 든다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희룡도 처음엔 ‘정치 도의상’ 강재섭에게 기회를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고 정운찬을 택했다. 그리고 이재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사이 참신한 신인을 찾는다며 탤런트 고현정과 박상원을 내세우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차인표의 경우는 실제 접촉까지 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강재섭은 아군이 휘두른 칼에 내상을 입고 있었다. 홍준표는 연일 불가론을 폈다. “분당을은 강 전 대표가 다섯 번 국회의원을 한 대구만큼 쉬운 지역인데 분당을에 출마하면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대통령도 ‘갸가 와 돌아오노’라고 했다고 하더라. 차라리 내 지역구를 내줄 테니 19대 때 서울 동대문을에 나오라 캐라(해라).”

강재섭도 강수를 뒀다. 3월 13일 아예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열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우군이었던 안상수도 초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상수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될 때 강재섭에게 진 ‘빚’이 있었지만 친이계 최대주주인 이재오가 정운찬 카드를 들이밀자 귀가 솔깃했다. 게다가 홍준표도 반대했고…. 무엇보다 분당을 보선에서 패배하면 대표직을 내놓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손학규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를 선언하자 안상수와 원희룡은 다급해졌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제1야당 대표가 직접 후보로 뛰어들면서 분당을은 4·27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원희룡은 비공식 라인으로 여론조사를 돌렸다.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임태희 차출’. 임태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치르는 선거에 다시 임태희를 출마시켜야 한다는, 다소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안상수가 다시 이재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재오는 워싱턴 출장 중이었다.

안상수=“아무래도 임태희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오=“지금 해외 출장 중이니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이재오의 답변은 시큰둥했다.

4월이 시작됐다. 1일 당 대책회의가 열리자, 보다 못한 김무성 원내대표가 나섰다.

김무성=“분당을은 어떻게 할 거냐?”

원희룡=“(우물쭈물하며) 월요일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김무성=“지금 당장 결론을 내려라. 강재섭을 (전략공천) 하려면 빨리 해야 한다.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다.”

원희룡=“….”

김무성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대통령의 성격이 그렇더라. 결정을 잘 안 내리고…. 이번에도 이재오가 강재섭이 안 되는 이유를 어그레시브하게(공격적으로) 쭉 설명한 뒤 ‘제가 책임지고 설득해서 정운찬을 출마시키겠습니다’라고 한 거지. 그리고 MB도 ‘그래? 그럼 한번 해봐’라고 하니까 ‘대통령의 뜻’이라며 총대를 메고 나선 거지. 그러다 일이 잘 안 되면 대통령도, 이재오도 쑥 빠져버리는 식인데, 이번 일도 그렇게 된 거다.”

게다가 안상수-원희룡 조가 마지막에 꺼내 든 임태희 카드는 ‘형님의 의심’을 불러왔다. 당시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의 전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SD)이 의심을 했습니다. 이재오가 임태희를 출마시켜 청와대에서 나오게 해서 SD의 입김을 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돌고 돌아서 강재섭’으로 갈 수밖에 없었죠.”

임태희도 당시 분당을 공천파동을 권력다툼으로 인식했다. “친박(親朴·친박근혜)은 강재섭을 막지 않았다. 친이도 이재오 쪽에서만 막았지, 이상득 쪽에서는 막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재·보선 패배 이후) 나보고 물러나라는 얘기까지 나온 것이다. 결국 세력 간 권력다툼이었다.”

4월 4일 결국 공천장은 강재섭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적전 분열로 상품(후보)은 이미 선도가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다. 4·27 분당을 보궐선거의 결과는 51.0% 대 48.3%의 패배. 한나라당은 민주당 이광재 지사의 중도하차로 함께 실시된 강원지사 보궐선거에서도 패하고 말았다.

분당을 공천파동은 친이계의 자폭(自爆)이나 마찬가지였다. 친이는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안상수는 대표직을 사퇴했고, 김무성의 후임을 뽑기 위해 그해 5월 치러진 당 원내대표 선거는 4·27에 이은 또 한 번의 적전 분열이었다.

MB는 임기 후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친이계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친이계 안경률 이병석 의원은 누구도 원내대표직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중립파와 쇄신파, 친박계의 지원을 받은 황우여 의원이 승리했다. 황우여는 이어 2012년 5월 대표까지 거머쥔다. MB정부에서 박근혜정부로 이어지는 황우여 대표 체제는 그렇게 탄생했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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