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김일성 만나고 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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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40>7·4남북공동성명 1

1972년 7월 4일 오전 “평양에 다녀왔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있는 이후락 정보부장(오른쪽). 동아일보DB
1972년 7월 4일 오전 “평양에 다녀왔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있는 이후락 정보부장(오른쪽). 동아일보DB
매년 대형 사건들이 정국을 뒤흔들어댔지만 1972년은 더했다. 오죽했으면 그해 말 동아일보가 72년을 정리하면서 ‘충격의 홍수’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그중에서도 빅뉴스는 뭐니 뭐니 해도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 1972년 7월 4일, 아침부터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에 TV와 라디오 앞에 국민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오전 10시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강당 연단에 섰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일성은 “평양에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모두 놀라 자빠졌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72년 5월 2일부터 5일간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으며 김일성과도 두 차례 회담했습니다. 또 평양의 김영주 부장을 대리해 박성철 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에 왔습니다. 박성철은 저와 두 차례, 박정희 대통령과는 한 차례 회담했습니다.”

이어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6·25전쟁 후 남북 당국 간 첫 번째 합의로 불리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성명은 우선 자주적·평화적·민족대단결로 통일을 이룬다는 ‘통일 3원칙’을 처음으로 확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 중상비방·무력도발 중지, 다방면적 교류, 적십자회담 성사, 서울∼평양 직통전화 가설,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 군사적 대치 국면에서 좀체 기대하기 어려운 합의들을 담아냈다. 남한의 이 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발표한 이 성명이 대내외에 던진 충격파는 컸다. 국민은 충격과 함께 기대에 부풀었다.

‘아 통일은 오는가, 벅찬 감격’이라는 제목의 7월 4일자 석간 경향신문 기사는 당시 흥분된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기대 놀라움 감격 환호. 마음들은 다시 통일된 날의 기대로 벌써 치달았다. 장마로 흥건한 강산이 감격으로 젖어 흘렀고 눈물이 주르르 하염없는 실향민들은 통일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감사하면서도 이런 때일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냉정을 되찾으려 했다. 남북 대표의 왕래 내용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자주 평화 통일 원칙 합의’에 목이 메었다. 특보와 호외를 내는 신문기자들 자신도 한참이나 손이 얼어붙은 듯 붓이 달리지 못했고 거리 가정 상가 관가 대학가 모두가 흥분된 표정 그것이었다. …거리엔 비에 맞는 것도, 갈 길마저도 잊은 국민의 감격들이었다.’

7월 4일자 석간 동아일보도 전국 표정을 이렇게 전한다.

‘어떤 시민은 수첩을 꺼내 발표 내용을 메모하기에 바빴으며 회견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앞으로의 전망을 제 나름대로 점쳐보기도 했다. …대전 시내 140여 개 다방에서는 방송을 듣는 시민들로 붐볐고 발표가 시작되자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흥분한 모습도 보였다…길을 가다 말고 라디오가게 앞에서 중대 발표를 들었다는 광주의 한 시민은 ‘분단 27년 만에 남북의 숨통이 트이는가 보다’고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 기사는 당시 각계 여론 주도층의 반응도 함께 싣고 있는데 2011년 작고한 한국문학의 거장 소설가 박완서 씨의 솔직한 토로가 눈길을 끈다.

‘그동안 철저하게 반공정신으로 굳어왔던 내 머리는 심하게 혼란을 겪고 있다. (발표 내용 중에는) ‘상대방을 비방 말며∼’라는 구절도 있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나 자신부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착잡할 뿐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내 사고방식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전란 중에 오빠와 숙부를 잃고 고향 땅을 잃은 실향민의 한 사람으로서 작가가 받은 충격과 혼란이 그대로 전해지는 말이다.

박 정권에 사사건건 비판적이었던 장준하조차도 7·4공동성명만큼은 지지했을 정도였다. 장준하는 성명이 나온 직후인 72년 ‘씨알의 소리’(70년 4월 19일 창간된 진보성향의 잡지) 9월호에 ‘민족주의자의 길’이란 제목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노력,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성명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사(死)문서’가 되고 만다. 양측이 ‘통일 3원칙’에 대한 해석을 놓고 성명 발표 직후부터 옥신각신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주’ ‘평화’ 원칙을 즉각적인 주한미군 철수와 군축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고 남측은 여기에 신뢰 구축에 이은 단계적인 군축이라는 입장으로 맞섰다. ‘민족대단결’ 원칙에서도 입장이 갈렸다. 남측은 민주화와 인권보장 등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입장을 전개했지만 북측은 국가보안법 철폐, 민주인사 석방 등을 들고 나왔다.

똑같은 문구를 두고 이런 판이한 해석이 나온 것을 두고 결국 ‘7·4남북공동성명’은 통일이 목적이 아니라 정치권력 강화라는 목적을 가진 남북 권력자들의 동상이몽(同床異夢)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실제로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남북은 약속이나 한 듯 권력 강화로 요약되는 개정헌법을 공표했다.

남한은 3개월 뒤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북한은 5개월 뒤인 12월 27일 1948년에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을 폐기하고 김일성 1인 절대독재 체제를 보장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만든다. 김일성은 이듬해 9월 김정일을 조선노동당 최고 권력기관인 비서국 비서로 격상시키며 후계 체제를 굳힌다.

하지만 7·4공동성명은 남북의 국내적 요인 외에도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2차 세계대전 후 갈가리 찢겼던 세계가 화해와 긴장완화 모드로 들어서는 ‘데탕트’였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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