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규 교수와 함께 한 대륙 속 우리문화 흔적을 찾아서]<1> 저장성 ‘신라태자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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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주민 지금도 ‘신라신’ 숭배… 신라초 - 신라오촌 등 곳곳 신라이름

그래픽=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그래픽=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 문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중국과 한국은 교류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운명을 타고났다.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중문학)는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 본토 내 한국 문화의 흔적을 찾아왔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사라진 중국에서 한반도와의 교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최치원 장보고 최부 등 알려진 인물들의 자취에 더해 새롭게 발굴된 양국 교류의 흔적과 의미 있는 현장을 5회에 걸쳐 소개한다. 》

중국 저장 성 원저우 시 핑양 현 신라산에 있는 신라태자상. 이곳 하오더링쯔 관장은 “핑양 현의 많은 사람이 신라 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며 “질병 치료와 미아를 찾아주는 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람들이 자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저장 성 원저우 시 핑양 현 신라산에 있는 신라태자상. 이곳 하오더링쯔 관장은 “핑양 현의 많은 사람이 신라 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며 “질병 치료와 미아를 찾아주는 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사람들이 자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저장(浙江) 성 원저우(溫州) 시 핑양(平陽) 현 쿤양(昆陽) 진의 골목길. 산자락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5분가량 올라가면 황색 건물의 붉은 철문을 만난다. 한국인이라면 이 철문 위 현판에 새겨진 다섯 글자를 보는 순간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新羅太子館(신라태자관)’. 지난달 12일 부슬비가 내리는 오전, 경주에서 1200여 km나 떨어진 중국 남부의 중소도시에서 신라를 만났다.

이 지역 도교 신자들은 입신공명과 사업 성공, 출산을 기원할 때마다 이곳을 찾아 향불을 올린다. 문화 유적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도교 사당이다. 신라태자관이 있는 산의 이름도 ‘신라산’이다.

철문을 밀고 들어가 붉은색으로 치장한 본전 앞에 서니 현판에는 ‘신라태자관’ 글씨가 더 크게 새겨져 있다. 길게 기른 머리에 비녀를 꽂고 검은 제의를 입고 나타난 하오더링쯔(好德靈子) 관장은 “오래전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라 할아버지는 예부터 이 지역에서 수호신으로 모시는 존재”라며 “나도 신라 신의 계시를 받아 도교에 몸담게 됐다. 신라태자관을 찾는 신도는 1000여 명”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신라태자가 숭앙받는 연유는 무엇일까. 이 지역의 지방지에는 예부터 신라묘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1503년 명대 원저우 부지(府志)에서 시작해 여러 사료에 관련 기록이 보인다. 기록에 나타난 사연을 종합하면 이렇다. ‘신라국 태자가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들어오는 길에 핑양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다. 이후 신라태자의 영혼이 나타나 지역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이에 지역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신라산은 신라태자관의 이름에서 나왔다.’

신라묘가 크게 조성됐던 현 열사공묘 앞에서 옛 신라인의 흔적을 더듬고 있는 박현규 교수.
신라묘가 크게 조성됐던 현 열사공묘 앞에서 옛 신라인의 흔적을 더듬고 있는 박현규 교수.
명 청대에 걸친 여러 기록 중에는 그 주인공을 태자 대신 국왕이나 왕자로 기술한 것도 있다. 신라 신은 이 지역에서만 인정하는 신이 아니다. 자주 ‘효험’을 부리며 지역민을 돌봐준다고 본 원나라 조정은 1322년 신라 신에 ‘충의영제위혜광우성왕(忠義靈濟威惠廣佑聖王)’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신라신이 조정에서도 인정받는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현 신라태자관에서 산 정상으로 500m쯤 가면 널찍한 평지가 나온다. 원래 신라묘가 있었던 장소다. 이곳에 있는 남송 주원구(周元龜)의 비석문에는 ‘신라 신이 나타난 지역, 재난과 환란을 물리친 사례, 봉호 등을 받은 기록 등이 전한다’고 기록돼 있다. 신라묘는 주원구의 사망연도인 1249년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 신라태자관은 1956년까지는 이곳에서 200m가량 떨어진, 중국혁명열사 250명의 묘역인 열사공묘 자리에 있다. 열사공묘에는 청대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조성한 가산(假山)과 물이 흐르는 정원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동안 사라졌던 신라태자관은 1998년에 핑양 현 도교협회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면서 다시 등장했다. 물리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지역민의 마음속에는 신라 신이 살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신라태자관에만 신라 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태자관에서 남쪽으로 11km 떨어진 아오장(鰲江) 진 샤창(下廠) 촌에서는 신라 신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남아 있다. 2010년 3월에는 마을 신라전의 기록을 담은 성좌석비(星座石碑)가 인근에서 발굴됐는데 여기에는 ‘명대인 1540년에 신라전이 창건됐다’고 기록돼 있었다. 마을 대표인 정쥐인(鄭巨印) 씨는 “예부터 어업활동이 많아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신라 신에게 빌어왔다”고 말했다.

샤창 촌에서 6km가량 떨어진 둥산(東山) 촌에 청나라 때인 1766년 세워진, 신라 신을 모시는 ‘동산전(東山殿)’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번 취재과정에서 새로 발굴됐다.

신라인은 예부터 국제적인 감각을 갖고 왕성한 해상활동을 전개했다.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의 해상세력은 동아시아 해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곳은 해류 등의 영향으로 한반도에서 표류한 배가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곳이기도 하다. 표해록(漂海錄)을 쓴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崔溥·1454∼1504)도 이 지역에 표착한 뒤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따라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갔다.

빈번한 교류의 흔적은 이 지역 곳곳의 지명으로 남았다. 동쪽 푸퉈(普陀) 산 앞바다에 있는 암초 이름은 신라초(新羅礁)인데 신라 상인이 탄 배가 좌초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닝보(寧波) 시 신라오촌(新羅奧村)과 린하이(臨海) 시의 신라서(新羅嶼)는 신라 선박들이 정박했던 곳이다. 해상 교류는 고려로 이어져 타이저우(臺州) 만 앞바다 상다천(上大陳) 섬에 있는 바위산 이름은 고려두산(高麗頭山)인데, 고려로 향하는 선박들이 이를 지표로 삼았다는 곳이다.

중국 사람들이 신라 신에게 자신과 가족, 마을의 안위를 기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와 당이 교류할 당시 신라인에 대한 당나라 사람들의 인식이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출한 인물이 있더라도 신라인에 대한 인상이 나빴다면 오랫동안 민중의 사랑을 받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는 곤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역과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 만남의 진정한 의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 신라태자는 누구일까

金一로 전해질 뿐 왕족 출신 추측만


신라태자관의 신라 신은 임금이 입는 용포(龍袍)를 입었고 수염이 긴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쥘부채인 접선(摺扇), 왼손에는 역서인 만년력(萬年曆)을 들고 있다. 그 옆에 청룡검(靑龍劍)이 놓여있다. 다른 신라 신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모습을 한 신라 신에 대해 저장 성의 지방지에는 정확한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1999년 원저우 시 도교협회에서 펴낸 ‘온주도관통람’에 신라태자관에 모셔진 신라태자의 이름이 김일(金一)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편찬자에게 확인한 결과 ‘민간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외의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신라 왕족의 방계 자녀들도 왕자나 태자로 칭한 경우가 많다.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갔던 원측(圓測), 무염(無染), 무상(無相) 스님도 왕족 출신이다. 이들은 국왕의 직계 자제는 아니지만 중국 문헌에는 모두 ‘신라 왕자 출신’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신라 왕족 가운데 훗날 국왕이 된 인물로는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 김춘추의 첫째 아들 김법민이 있다. 당나라에 있다가 당 고종에 의해 신라 국왕으로 봉해지기도 했던 김춘추의 둘째아들 김인문도 여러 차례 당나라를 드나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모두 신라 신에 대한 기록과 들어맞지 않는다. 현존 문헌만으로는 ‘신라태자’가 누구인지 특정하기 힘들지만 이들 왕족 출신 중 누군가일 가능성이 있다.

원저우=글·사진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신라#저장성#신라태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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