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이헌정 도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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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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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유학시절 힘들때면 접어주시던 종이비행기… 내겐 ‘희망’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ko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kon@donga.com

나의 은사이자 이젠 감히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로버트 라스뮤센 씨를 만나게 된 건 히피문화와 펑크아트의 발상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1993년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히피문화와 펑크아트에 매료돼 떠났던 타지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 당시 자유로운 정신을 대표하는 예술학교인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방문했을 때 우연히 이뤄진 라스뮤센 교수(조각 전공)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홍익대에서 도예 석사 과정을 마친 나는 그 학교에서 조각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또 하려 했다. 그는 “왜 석사 과정을 반복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내 말을 들은 라스뮤센 교수는 엉뚱하게도 거액의 학비를 들여서 또 한 번 대학을 다니느니 차라리 장기간에 걸쳐 미국 전역을 여행하라고 권했다. “살아있는 여행을 하게나.”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는 동양에서 온 학생이 미국의 교육을 통해 동양인이 갖고 있는 긍정적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너는 5000살, 나는 500살”이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한국과 미국 문화의 상징적 역사를 비교하기도 했다.

문화적 충격과 언어의 부족함에 더해 경제적 곤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던 유학 초기에 그는 가끔 내 작업 테이블에 ‘희망의 종이비행기’를 접어 올려두곤 했다. 희망의 종이비행기가 뭔지 궁금하지 않은가.

나의 스승 라스뮤센 교수는 대학원 시절 나의 절박함에 한 번도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스승은 밤을 지새워 고민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본 뒤 직접 접은 종이비행기에 드로잉을 해 간접적인 답을 제시하곤 했다. 때로는 책을 복사해 옮겨 형광펜으로 밑줄 쳐서 종이비행기에 담기도 했다. 아마도 라스뮤센 교수는 선생이 믿는 것을 그대로 제자에게 주입하는 교육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내 삶과 예술을 논리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닌 체험으로 깨달아가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후 1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스승은 한국을 세 번 방문하였고 나는 그가 은퇴한 후 보금자리인 아일랜드의 매크룸이라는 마을을 세 번에 걸쳐 방문했다.

그는 우리 부부가 보낸 고춧가루와 직접 심어 재배한 배추로 우리의 방문에 맞춰 김치를 담가 놓는다. 노르웨이 태생으로 아일랜드에 사는 미국인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이 바로 유럽 어느 깡촌에서 담가주는 김치다. 아마도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아닐까.

재학 시절 제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한 번도 강요하지 않은 스승은 최근 아일랜드를 방문한 나에게 공항에서 말했다.

“헌정, 일을 너무 많이 하지 말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 채고는 가벼운 웃음으로 어색함을 얼버무리려는 제자에게 그는 “농담하는 게 아니네.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네”라고 했다. 그는 어린 제자의 순수했던 열정이, 그리고 삶의 목적이 수단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는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아일랜드 지역 사투리를 쓰는 이웃 주민들을 모아놓고, 당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미국의 유명 배우(브래드 피트)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가 (나의 제자) 헌정의 작품을 구입했는데 어쨌는데 하면서 자랑을 했다. 그러고는 선생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선생은 강의자가 아닌, 먼저 인생을 산 사람의 모습 아니냐. 너도 그렇게 돼야 한다.” 다분히 동양적인 관점으로 스승의 모습을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리고 “너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선생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평소 그답지 않은 당부를 했다.

‘그답지 않은’ 두 번의 당부. 스승의 연로한 모습에 서글퍼짐과 동시에 마치 망치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는 듯한 깨달음이 들었다.

이헌정 도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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