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행복한 사회]<1>결혼, 안 하나 못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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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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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포 쓰고 싶다, 그런데 행복해질 자신이 없다

《 현실이 팍팍하니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대다수의 20, 30대 미혼 여성에게 결혼은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더 많다. 회사원 송모 씨(30·여)는 6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 남자친구 나이는 꽉 찬 서른두 살. 2년 전부터 결혼 이야기가 오갔지만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돈이 문제였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 환상이죠. 주변 얘기를 들어봐도 결혼하고 안정적으로 기반을 잡으려면 여자 쪽에서 못해도 4000만∼5000만 원은 준비해야 해요. 그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일찍 결혼하는 친구 대부분은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있어요. 저희 집은 아니거든요.” 》

국내 중견 기업에 다니는 송 씨의 월급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다. 하지만 직장생활은 고작 1년 남짓. 결혼자금을 모으려면 한참 멀었다. 입는 것 먹는 것을 아끼고, 펀드며 주식이며 다 해봤지만, 물가 높고 경제가 불안하니 백약이 무효다.

송 씨 주변에는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결혼을 미루는 커플도 많다. 출혈 대출이나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면 서울 시내에 전셋집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러다 보니 결혼을 준비하면서 사이가 멀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헤어지기도 했다. 요즘은 취업난도 결혼을 더욱 어렵게 한다. 대학 졸업을 미루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면 결혼자금을 모으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송 씨의 한숨도 깊어간다.

“정말 결혼하고 싶어요. 앞으로 1, 2년 내에 결혼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못하면 남자친구와도 어떻게 될지 불안합니다. 과연 그때까지 돈을 모아서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요?”

국내 한 연구원에서 비정규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정모 씨(29·여)는 송 씨와 달리 결혼 생각이 별로 없다. 언제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비정규직에 단순 사무직이다 보니 전문성을 키운다는 꿈은 애초에 포기했다. 탈출을 꿈꾸지만 탈출구가 결혼은 아니란다.

“결혼한다고 해서 미래가 보장되나요?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요? 여유 없는 사람끼리 결혼한들 팍팍한 인생살이가 바뀔까요? 더 큰 집,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돈을 좇아 끊임없이 쳇바퀴만 돌리겠지요.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고 싶지 않아요.”

설령 결혼한다 해도 아이를 낳는 것은 또 별개다. 정 씨는 “내 인생도 이렇게 힘겨운데, 아이까지 낳고 싶지 않다. 내가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정 씨가 보기에 결혼은 이미 오래전에 손익을 따지는 ‘거래’가 됐다. 주변을 돌아봐도 체크리스트에 표시를 하듯 조건을 확인한 뒤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 내게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배우자라도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연봉의 소유자이길 바라는 거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비정규직은 577만1000명으로 전년보다 5% 늘었다. 같은 기간 정규직 증가율은 1.6%. 비정규직 증가율이 아주 가파른 셈이다. 비정규직은 2009년 537만4000명, 2010년 569만8000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비정규직이 받는 월급은 평균 135만6000원으로, 정규직 236만8000원의 57.2% 수준이다. 사회보험 가입률도 국민연금 39.5%, 건강보험 45.1%, 고용보험 44.1%에 그쳤다.

고용이 불안하니 그만큼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도 힘들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송 씨와 정 씨의 상황은 이 시대를 사는 20, 30대 여성들의 자화상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예전에는 당연시했을 ‘결혼하고 행복한 엄마가 되는 것’에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의구심은 현실이 됐다. 2010년 한국 여성의 초혼 평균 연령은 28.9세를 기록했다. 바로 그해, 첫째 아이를 낳은 산모의 평균연령은 30.1세를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30세를 넘겼다. 전체 산모의 평균 연령도 32세를 넘어섰다. 결혼을 포기하거나 늦출수록 출산율도 낮아질 공산이 크다.

대학원생 김모 씨(28·여)는 2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복귀했고, 요즘엔 해외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마침 남자친구와 혼담이 오가고 있다. 함께 유학을 떠나면 좋겠지만 남자친구는 최근 입사한 직장에서 자리 잡고 성공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제가 유학 갈 때 남자친구가 따라올 가능성은 없어요. 남자가 유학을 가면 여자는 하던 일을 관두고 함께 떠나지만 여자가 유학을 간다고 남자가 따라오지는 않죠. 그게 현실이에요.”

김 씨 친구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결혼을 하고 나면 아무래도 미혼일 때처럼 일하는 건 힘들어진다. 아이를 갖기라도 하면 더더욱 그렇다.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결혼한 뒤 직장에서의 최종 목표를 하향 조정하는 여자 선배들을 봐왔다. 김 씨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정과 일, 두 가지를 모두 잘한다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 씨와 남자친구는 결혼식을 치르되 유학이 끝날 때까지만 떨어져 사는 방향으로 결심을 굳히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2세를 가지려면 최소한 4, 5년을 기다려야 한다. 나이가 들어 아이를 못 낳게 되는 건 아닐까?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유학을 다녀온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지금의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LG경제연구원이 16∼59세 1400명을 상대로 조사해 지난달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25%만이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 명 중 세 명에게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인 것이다. 이 조사에 응한 20대의 개인적 관심사는 주로 공부와 자기계발(21%), 취업과 이직(16%)이었다. 가장 관심이 많은 사회 문제로는 실업과 비정규직(24%)을 꼽았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결혼과 출산이 20대와 30대의 ‘관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전문가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기피하는 세태가 저출산 문제의 새로운 원인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재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가 결혼을 늦추는 이유와 아이를 낳지 않거나 적게 낳는 이유는 거의 비슷하다”며 “결혼과 출산을 위한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젊은 여성들은 이제 정해진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결혼 안해도 그만” 51%… 40세 미혼 25년새 6배로 ▼

똑 부러지는 성격에 간호사라는 버젓한 직업도 있는 20대 여성의 목표가 오로지 성공적인 결혼이다. 검사 남편을 얻기 위해 ‘예비 시댁’에 음식을 해 간다. 시어머니가 냉랭하게 대하자 시할머니 마음에 들려고 살갑게 행동한다. 결혼 뒤에는 잘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미대에 진학하더니 아이를 낳는다.

1998∼99년 시청률 50%를 훌쩍 넘기며 히트했던 TV 일일연속극 ‘보고 또 보고’의 주인공 은주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 결혼에 목숨을 거는 은주 같은 여성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결혼 자체를 거부하는 여성이 더 많아졌다고나 할까.

노동연구원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만혼의 나이도 넘긴 40세 여성 가운데 미혼이 차지하는 비율은 1985년 1.1%에서 지난해 7.0%로, 무려 6배 이상으로 늘었다. 45세 여성도 0.7%에서 1.9%로 증가했다.

결혼에 대한 인식이 ‘꼭 해야 하는 것’에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으로 바뀌었음을 입증하는 통계도 있다. 지난해 11월 듀오휴먼라이프연구소가 성인 여성 500명, 남성 478명을 대상으로 ‘미혼남녀의 결혼인식조사’를 벌였다. 조사결과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의향이 있다고 답한 여성이 전체 응답자의 51.2%에 달했다. 절반 이상이 ‘결혼을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9.4%는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는 더 ‘과격한’ 답을 내놓았다.

다만 13년 전의 TV 속 은주와 여전히 비슷한 점은 있다. 바로 조건을 따진다는 점이다.

같은 조사에서 결혼에서 중요한 요소를 물었다. 사랑을 2점, 조건을 ―2점으로 가정했다. 조건이 더 중요하다면 마이너스 점수가, 사랑이 중요하다면 2점에 가까운 점수가 나오게 된다. 평균은 0.66점이었다. 그러나 결혼 연령대인 30∼33세 여성은 0.23점, 26∼29세 여성은 0.45점이었다.

출산과 관련해서도 ‘조건’이 중요했다.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냐는 질문에 연봉 40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 중 21.5%가 3명이라고 답했다. 반면에 1000만∼2000만 원의 소득자 가운데는 3명이라는 응답은 별로 없었고, 오히려 아이를 안 낳겠다는 응답이 7.94%를 기록했다.

:: 특별취재팀 ::
▽팀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팀원 정효진 (산업부) 구가인 (경제부) 신나리 (국제부) 이새샘 (사회부)
우경임 한우신 남윤서 최예나(교육복지부) 곽민영 (문화부)

:: 엄마가 행복한 사회 자문단 (가나다순) ::

강지원 변호사
김미경 더블유 인사이츠 대표
김행미 KB국민은행 강동지역 본부장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
이복실 여성가족부 청소년가족정책실장
임오경 서울시청 핸드볼 감독
전재희 국회의원·전 보건복지부 장관
전주원 전 여자농구 국가대표
정이현 소설가
조복희 육아정책연구소장
최성남 글로벌어린이재단 뉴욕 회장
한경희 생활과학 대표
한영실 숙명여대 총장

happym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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