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이 사는법]한범수 한국관광학회 회장

  • Array
  • 입력 2011년 7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색소폰 불기 1년여… 어느날 작곡이 술술∼

한범수 교수는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1년은 그냥 갑니다. 뭐든지 3년만 몰입하면 해낼 수 있습니다.” 갈망하는 자는 계속 꿈꿀 수 있다. 그는 지금도 꿈을 꾼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한범수 교수는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1년은 그냥 갑니다. 뭐든지 3년만 몰입하면 해낼 수 있습니다.” 갈망하는 자는 계속 꿈꿀 수 있다. 그는 지금도 꿈을 꾼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한국관광학회 회장인 한범수 경기대 관광개발학과 교수는 50세를 하루 앞둔 2007년 12월 31일 강원 강릉시 정동진 해변에 갔습니다. 지천명(知天命·50을 일컫는 말)을 코앞에 두고 ‘굿바이 마흔아홉’이라는 자기만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닷가를 바라보며 백사장에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 모습은 여전히 한 교수의 휴대전화 초기화면에 담겨 있습니다.

○ 50세 맞이 색소폰 도전

한 교수가 쉰 살을 기념해 시작한 건 색소폰이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장난인지, 고의인지 모를 행동에 마음 아파하며 음악에 귀를 닫아버렸던 그가 다시 음악을 껴안은 겁니다. 울렁증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겨우 부를 수 있게 된 지도 얼마 안 되는 그가 ‘악보를 과연 읽을 수 있을까’ 조바심도 났지만 무작정 학원에 갔습니다. ‘어떤 노래든 한 곡만 색소폰으로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가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이후로는 정말 무턱대고 색소폰을 불어댔습니다. 학교에서 제자들과 농구를 하는 중에도 쉬는 시간에 빽∼빽∼거리는 통에 숱한 학생의 얼굴을 찌푸리게도 했습니다. 색소폰 선생님을 잘 만난 덕에 재미가 생겨서 틈날 때마다 서너 시간을 그냥 불어 젖혔습니다. 하도 연습을 했더니 색소폰 소리통이 닿는 오른쪽 갈비뼈 부분 근육에 탈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색소폰을 배운 지 1년이 좀 넘었을 때입니다. 학회 참석차 미국에 간 한 교수는 샌프란시스코를 이륙하는 비행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상이 마구 떠오르는 겁니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볼펜으로 오선을 긋고는 콩나물을 그려나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노래가 있는 곳/샌프란시스코/가슴이 우는 곳∼’ 하는 노랫말도 술술 흘러나왔습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한 교수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무식해야 곡을 씁니다.” 한 교수는 흔히 작곡에 필요하다는 화성법이니 대위법 같은 건 전혀 몰랐습니다.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벽이 됩니다.” 그렇게 한 교수는 그해 80여 곡을 작곡했습니다.

○ 꿈은 꾸는 자의 몫

그렇게 모아놓은 곡들이 좋은 인연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의 한 친구가 “작곡한 것들을 전문가에게 한 번 보여주면 어떻겠느냐”며 김해에 사는 오혜란 선생을 소개해줬습니다. e메일로 보낸 곡을 받아본 오 선생이 전화로 얘기했습니다. “한 선생님. 작곡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이렇게 곡을 쓰지 않지요.” 한숨이 푹 나왔습니다. 그런데 오 선생이 “하지만 그래서 더 곡이 순수하고 느낌이 좋아요. 제가 편곡을 해도 될까요”라고 덧붙이자 뛸 듯이 기뻤습니다.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오 선생은 지역의 한 교향악단에 몸담고 있다 개인 사정으로 음악을 5년가량 쉬고 있었습니다. 피자집을 하다 잘 안 돼서 골프연습장에서 골프공 닦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한 아마추어 음악인의 어설프지만 진지한 곡을 접하고 다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찾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 선생이 실내악곡으로 편곡한 작품 중 두 곡이 이달 초 경기 수원시에서 열린 ‘2011 관광학 국제학술대회’에서 정식 연주됐습니다. 오 선생의 옛 동료들이 연주를 해줬습니다. 물론 연습 초기에 연주자들은 한 교수를 믿지 못해 “사기꾼한테 속은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연주자는 “그런 작곡가의 곡은 연주할 수 없다”고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인기 있던 TV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연상시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 중에는 “그거, 배부른 사람 이야기 아냐”라고 말할 분도 계실 듯합니다. 한 교수의 대학 때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장희빈’입니다. ‘장안의 희귀한 빈대’란 뜻입니다. 한 교수는 새는 상하수도 파이프를 때우는 노동을 했던 아버지와 일당 3000원을 받으며 밭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 중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교수가 유일합니다. 대학 다닐 때도 월세 단칸방에서 살았기에 그는 주로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장희빈입니다.

그러나 한 교수는 기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낙천적, 긍정적, 엉뚱함으로 꼽는 그는 무엇이든 자기 마음에 들어온 일은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일 만큼 미친 듯이 해냈답니다. 그는 말합니다. “‘될까?’ 하는 마음이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번 해보지 뭐” 하는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꿈은 꾸는 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