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가인열전]<2>임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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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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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커다’ 포효… 동굴서 뛰쳐나온 호랑이

《조용필이 양지의 가왕이라면 임재범은 어둠의 제왕이다. 조용필의 승리가 끝없는 연습과 음악적 열정으로 이룬 후천적인 승리라면, 임재범은 자학과 가학 사이를 오가는 본능의 더듬이로 폭발하는 음악적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재능을 타고났다. 그러나 25년을 넘어서는 그의 음악 이력서는 파란으로 점철된 어두운 무용담이다. 그는 김건모 재도전 파문으로 위기에 처했던 MBC의 ‘나는 가수다’를 단 세 곡의 노래로 되살린 일등 공신이지만 거꾸로 거의 잊혀져 가던 그를 밝은 세상으로 끌어낸 것도 ‘나는 가수다’였다.》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1986년 언더그라운드 중에서도 변방의 장르인 헤비메탈 밴드 보컬리스트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는 백두산의 호랑이와 같은, 굵고 묵직하면서도 금속성의 카랑카랑함을 담은 포효를 통해 록음악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시나위의 데뷔 앨범 타이틀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한국 헤비메탈 역사를 열어젖힌 기념비와 같은 노래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그는 시나위와 외인부대, 아시아나 같은 록밴드를 전전했지만 어디에서도 두 장 이상의 앨범을 같이하지 못했다. 징병제가 로큰롤 키즈들의 지속적인 밴드 활동을 가로막는 데다 거칠기 이를 데 없고 대중성마저 결여된 이런 사운드를 방송과 공연, 음반산업 모두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승철과 김종서, 그리고 시나위의 까마득한 후배 서태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긴 머리를 자르고 1991년 솔로 가수로 데뷔해 도시적 우수가 가득한 록 넘버 ‘이 밤이 지나면’으로 5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올리며 단숨에 정상에 진입한다. 언더그라운드의 설움은 이렇게 보상받는 듯했지만 연이은 표절 파동과 방송 펑크 등으로 긴 잠적에 들어가고 만다. 일찍이 19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두 영웅 전인권과 김현식을 넘어설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지만 그 실현은 오랫동안 유예되어야 했다.

6년의 침묵 후 그는 두 번째 앨범 ‘Desire to Fly’를 발표하며 ‘비상’ ‘그대는 어디에’ ‘사랑보다 깊은 상처’ 같은 솔(soul)의 짙은 음영이 묻어나는 미디엄템포의 록발라드를 선보인다. 30대 중반으로 돌입한 그는 더는 ‘로큰롤 베이비’가 아니었다. 여전히 은둔의 스탠스를 지니고 있었기에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이 컴백 앨범은 2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여성 팬층까지 유혹하는 충만한 남성성의 서정을 분만한다. 특히 작곡가 신재홍(‘너를 위해’의 작곡가)이 제공한 ‘사랑보다 깊은 상처’는 이듬해 데뷔한 박정현의 첫 앨범에 임재범과의 듀오로 재녹음되어 빛나는 혼성 듀오 곡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의 짧은 절정기를 빛내는 2장의 정규 앨범 ‘고해’(1998년)와 ‘Story of Two Years’(2000년)가 연이어 발표된다. 헤비메탈의 초심으로 돌아간 세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고해’와 그의 최대 히트곡이 된 4집의 ‘너를 위해’는 모든 보컬리스트를 절망시키기에 충분한, 모든 상처의 기억들을 웅혼하게 승화하는 압도적 절창이다.

그룹 ‘시나위’ 시절의 임재범(왼쪽)과 신대철. 사자 갈기를 닮은 장발의 임재범은 당시 무대에서 폭발적인 젊음과 열정을 토해냈다. MBC 제공
그룹 ‘시나위’ 시절의 임재범(왼쪽)과 신대철. 사자 갈기를 닮은 장발의 임재범은 당시 무대에서 폭발적인 젊음과 열정을 토해냈다. MBC 제공
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순한 노래 안에서도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든다. 하지만 2000년대는 이미지의 시대였고 한류의 깃발 아래 창궐한 보이그룹과 걸그룹의 전성시대였다. 2005년의 ‘공존’ 앨범과 몇몇 드라마 OST 참여 외에 그의 행적은 다시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런 그가 불사신처럼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두려워하고 경멸했던 TV 무대로. 후배 김범수는 ‘왕의 귀환’이라고 불렀고 작곡가 김형석은 ‘나만 가수다’라고 조크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안경을 쓴 그의 표정에선 1991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에 등장했던 이글거리는 도시의 야수 같은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너를 위해’와 ‘여러분’의 클라이맥스로 치솟는 원시적인 에너지는 순식간에 무대 위의 공기를 팽팽하게 흡입했고 순간 모든 이는 판단정지의 오르가슴을 맛보았다.

임재범(왼쪽)은 1989년 ‘백두산’의 기타리스트였던 김도균(오른쪽)과 록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건너가 현지인 멤버들과 밴드 ‘사랑’을 결성했다.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BBC 지역라디오에 출연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임재범(왼쪽)은 1989년 ‘백두산’의 기타리스트였던 김도균(오른쪽)과 록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건너가 현지인 멤버들과 밴드 ‘사랑’을 결성했다.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BBC 지역라디오에 출연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임재범에 대한 열광은 6월 25일 시작된 전국 투어가 삽시간에 매진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폐반된 이전 음반들이 재발매되었으며 중국과 일본까지 그의 방송 클립들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20여 년 전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함께 도전했다 좌절했던 영국 진출의 꿈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한류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부활하려는 조짐을 보인다. 임재범의 음악 인생은 지천명의 고갯마루에서 불현듯 깨어나 전진할 운명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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