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15>‘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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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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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요새 젊은이들은 보수적이라고 일침을 가하는 학자들이 있다. 자신의 이익만 돌보고 공동체의 공동선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물론 그들 자신은 개인만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인 쟁점을 철저하게 고민했다는 학창 시절의 무용담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자리는 많았고 상대적으로 그 일자리를 충당해야 할 대학생의 수는 현저하게 적었던 시절에 자신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다.

그렇다. 과거 대학생들 중 그 누가 지금처럼 취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젊은이들이 보수적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보수’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지킬 것이 있는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비만 버는 대학생들, 취업이 하늘에서 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취업 지망생들, 그리고 불안정한 고용조건에 노출되어 있는 직장인들에게 ‘보수적’이라는 용어를 붙인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 아닌가. 사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동물처럼 생존하는 것, 혹은 삶을 살아내는 것마저도 버겁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요즘처럼 살기가 팍팍했던 때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대학생들이 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의 경우 시급이 3000원이나 4000원 정도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10시간 일해야 3만 원 정도인데, 이것만으로는 생활하기도 빠듯할 것이다. 몸이 휘청할 정도로 일을 해도 그 대가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 만하다.

직장인들도 사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2010년 상장사들의 대졸 신입사원 평균 초임 연봉은 2789만 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지만 이것은 상장사들의 경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소기업의 경우 2000만 원 내외의 초봉을 받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결국 매달 200만 원이 채 안 되는 초봉을 받는 셈이다. 이 정도의 월급으로는 혼자 사는 것은 가능해도 가족을 거느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고 느껴질 만하다. 여대생들 사이에서 결혼이 최고의 취업이라는 말도 나올 만하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이클 샌델의 거센 열풍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난해 출간된 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아직도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문학작품도 아닌 인문서, 그것도 철학책이 이렇게도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는 경우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제 출판계에서는 아주 대놓고 ‘××는 무엇인가?’라는 형식을 갖춘 책을 대량으로 출간하고 있으며, 심지어 샌델 교수의 논지를 흉내 내는 책이나 혹은 신랄하게 반대하는 책도 나름대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을 정도다. 샌델 교수도 놀랄 일 아닌가. 태평양을 건너 자신의 책이 유독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거대한 파문을 불러올 줄은 그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하버드대, 그리고 하버드대에서도 명강의로 유명했던 필자의 아우라 때문도, 아니면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샌델 교수와 그의 책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에는 정의☆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부재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공기가 없을 때에만 우리는 공기를 의식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이미 2000여 년 전 노자(老子)가 간파했던 명백한 진리 아닌가.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화목하지 않으면 효도를 강조하고 사랑을 강조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라가 혼란해지면 충신에 대한 논의가 발생하게 된다.

―‘도덕경·道德經’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로 대표되는 당시 유학 사상을 조롱하는 노자의 어법이 신랄하기까지 하다. 유학이 효도, 사랑, 충성 등의 덕목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가족 질서에서부터 정치 질서에 이르기까지 혼란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가족 내부에 갈등과 대립이 없었다면 효도와 사랑을 이야기할 리가 없고, 정치에서 배신과 변절이 다반사처럼 일어나지 않았다면 충성과 신의에 대한 논의도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이 화목할 때 가족 성원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렇지만 가족이 화목하지 않을 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닌가. 중요한 것은 가족을 화목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을 찾아 그것을 제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치 질서가 안정될 때 군신 간에 충성과 신의의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정치 질서가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할 때 충성과 신의의 가치를 외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논점은 왜 정치 질서가 동요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데 있다. 노자의 눈에는 정의에 대한 우리의 요구나 갈망도 무기력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정의는 철학자들마다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샌델이 주장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이웃들이 자신이 지금 어떤 부정의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정의와 관련된 샌델의 논의는 현대철학에서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현대판 사회계약론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롤스☆☆도 그의 주저 ‘정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만일 불공정한 분배가 모든 사람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원초적인 재화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공정(fairness)으로서의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정의론’

롤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이웃들이 갈망하고 있는 정의가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샌델에 대한 열광은 재화가 불공정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절망감의 발로였던 셈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 이웃들 대부분은 납세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지만 그 세금이 제대로 분배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일한 만큼 봉급 액수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절망감 속에서 어떻게 우리 이웃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공정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근 무상급식과 관련된 복지 문제가 화두가 되었던 것도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우리 이웃들의 피해의식을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신의 삶도 빠듯하다는 느낌 때문에 설왕설래가 이토록 심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학생이나 신입사원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이웃들이 무엇인가 자신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박탈감을 느낀다는 사실 아닐까. 지금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 같은 사회적 기부 행위도 우리 이웃들의 박탈감을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샌델과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방치할 것인가. 샌델의 열풍은 징후적으로 독해해야만 한다. 정의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화두는 우리 삶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는 슬로건만으로 이런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 노자가 보았다면 이런 슬로건은 문제의 핵심을 치유할 의지가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장기간에 걸쳐 수술이 필요한 상처를 미사여구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이 일한 만큼 대우해 달라는 갈망에 대한 일시적인 미봉책이 아니라 구조적인 수술에 대한 의지이자 결단이다.

강신주 철학박사

정의(正義·justice)☆
서양의 경우 정의는 교환적 정의, 분배적 정의, 그리고 규제적 정의 등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되어 논의되고 있다. 동등한 것이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환적 정의이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분배적 정의라면, 범죄자에게 그 대가를 내림으로써 공동체의 규범을 확립하려는 사법적 정의가 규제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경우 정의를 뜻하는 의(義)라는 글자는 제사에 사용된 양(羊)을 분배하는 행위와 관련된 것이다. 의가 주로 ‘마땅함’이나 ‘합당함’이라는 뜻으로, 분배적 정의의 의미로 논의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존 롤스☆☆

현대적 감각에서 정의의 개념을 새롭게 부각시켰던 정치철학자다.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이란 주저를 통해 그는 공정으로서의 정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정의는 두 가지 원리로 정의될 수 있다.첫 번째 원리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타인의 자유와 양립 가능할 정도로 자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리에 따르면 사회적 불평등은 첫 번째 원리에 위배된다면 해소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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