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정찬주]좁다란 산길 막아선 나무라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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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그친 사이에 아내와 함께 비설거지하듯 서둘러 매실을 땄다. 올해도 네댓 친지에게 보낼 요량으로 손에 닿는 것만 땄다. 두어 시간 땀을 흘리면서 오랜만에 꾀꼬리 노랫소리도 들었다. 산림조합에서 1653㎡(500평) 되는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고 굴착기가 거친 기계음을 내는 몇 달 동안 산방(山房) 둘레의 숲에서 사라졌던 꾀꼬리다. 평소에 아름다운 무위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던 꾀꼬리가 인간의 무례한 문명에 놀란 셈이다. 처지를 바꿔본다면 자신의 삶터를 잃어버렸던 꾀꼬리가 인간을 원망했을 듯도 하다.

불가의 수행자는 깨달음에 이른 순간 자신과 우주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체득한다고 한다. 우주 안의 뭇 생명과 하나가 되는 셈이다. 유정(有情)의 인간뿐만 아니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한 몸이 된다고 하니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단어가 종교적인 수사만은 아닌 듯하다.

지난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이 송광사 불일암에 계실 때다. 나는 스님을 뵈러 서울에서 자주 내려가곤 했는데, 밥 먹고 차 마시고 일하는 스님의 일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내면에는 어떤 자각과 충만함이 차오르곤 했다. 스님은 유무정물의 생명에게 예의를 지키며 정진하고 계셨다. 스님에게는 하찮은 미물이 없었다. 모든 사물이 다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는 마당가의 후박나무를 늘 한 번씩 안아주었고 산길에 난 죽순을 보고서는 혼잣말로 “녀석아, 여기는 사람 다니는 길이다. 네 길이 아니면 오지를 말아야지”라고 하셨고, 제자들이 새롭게 낸 산길의 중간쯤에 선 나무 한 그루를 보고서는 “잘살고 있구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흡족해했다. 제자들이 다람쥐꼬리만 한 산길을 닦으면서 나무를 베지 않으려고 일부러 좁게 낸 것에 대한 치하였다.

제자의 측은지심 칭찬한 법정 스님

불일암 산자락에 자생하는 달맞이꽃도 사랑하셨다. 언젠가 한국화가인 원공거사가 불일암 아래채에서 그린 달맞이꽃 그림을 보시더니 졸고 있는 노승을 닮았다며 좋아하셨다. 그 그림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이끼 낀 돌을 방에 들여 한겨울을 같이 보낸 것만 봐도 스님께서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스님의 불일암 은거에 대해 저잣거리 사람들은 오해의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수행자가 산중암자에만 머무는 행위는 함께 나눠 져야 할 무거운 사회적 책무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섭섭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고를 졸렬한 단견이라고 본다. 수행자가 스스로의 질서를 지키며 홀로 정진하는 일은 우주와 한 몸이 되는, 즉 전체가 되는 치열한 자기완성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수행자의 존재의미가 있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추 역할이 아닐까 싶다. 마침 하안거를 맞이한 전국의 산사 선방은 죽비소리만 깨어 있을 뿐 일제히 침묵에 휩싸여 있다. 저잣거리는 승패가 가려지는 지자체장 선거와 월드컵 축구 열기로 뜨겁고 들떴는데 산사의 선방은 심연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이(不二)의 문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의 에너지를 한데 모으는 열광의 가치 못지않게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침묵의 가치도 소중하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병적인 집착이 되고 사고는 자폐를 면치 못한다.

우리가 균형감각을 잃어버리는 모습도 한쪽의 가치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편을 가르는 정치행위도 마찬가지다. 고승이 깨닫고 실천한 중도(中道)라는 경지도 어떤 맥락에서는 균형감각과 동의어다. 내가 기차와 버스를 타고 불일암을 가곤 했던 일도 내 나름대로 균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

법정 스님을 찾아 스위스에서 왔던 철학자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철학자가 스님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산중에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헌신이나 봉사처럼 계량화되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온 그 철학자는 철저하게 홀로 수행하는 스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열광과 침묵도 공존해야할 세상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내 식대로 홀가분하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철학자는 스님의 생각과 모습에서 조급하게 가치를 추구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고, 시비를 가리려 드는 서양인의 타성을 버리고 우리 불교의 매력에 빠졌다고도 한다.

내 산방 밭에 자라는 매화나무도 수행자의 덕화처럼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을 만개하고 향기를 계곡 밑으로 흘려보낸다. 그뿐만 아니라 꽃 진 자리에 매실을 익게 하여 지인들에게 선사하게 한다. 매화나무 가지에는 아직도 매실이 주렁주렁하다. 누구건 내 산방을 찾아와 매실을 따가도 나는 막지 않을 것이다.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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