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전원에 사는 사람의 꾸밈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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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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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신흠(申欽) 선생의 수필 중에 ‘야언(野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요즘은 여(與)나 야(野) 하면 으레 정치적 입장을 떠올리지만 조상에게 있어 야(野)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전원이라서 군자의 정신적 배경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신흠 선생도 글 제목을 ‘전원에 사는 사람의 꾸밈없는 이야기’로 스스로 풀었습니다.

신흠 선생은 여기서 인생에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좋은 친구, 좋은 책, 좋은 경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파에 시달려 심신이 지칠 때마다 선생이 낮고 차분한 어조로 들려주는 꾸밈없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음에 청량한 솔바람이 불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절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소탈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속됨을 고칠 수 있고,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편벽됨을 깨뜨릴 수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고루함을 바로잡을 수 있고, 인품이 높은 친구를 만나면 나의 타락한 속기(俗氣)를 떨쳐버릴 수 있고, 차분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경망스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욕심 없이 사는 친구를 만나면 사치스러워지려는 나의 허영심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선생은 사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친구를 통해 설파했습니다.

산속에 살지라도 경서와 제자백가서와 역사서는 물론 약재와 방서(方書) 같은 것도 갖추어 두어야 한다고 선생은 강조했습니다. 개울물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적막한 밤, 이부자리를 펴기 전에 잠시 책을 보는 것을 선생은 예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바람 몰아치는 날 대문을 닫고 방 청소를 한 다음 앞에 가득히 쌓인 책 가운데서 마음에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뽑아서 펼쳐보는 일 또한 예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자는 백세에 향기를 전할지언정 한 시대의 아름다운 자태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는 호연지기를 일깨웠습니다.

저무는 봄, 소나무와 대나무가 서로 마주 보는 숲 속 바위에 앉아 거문고를 타는 일, 스님과 솔밭 바위에 앉아 인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 마음에 맞는 벗과 바위 끝에 벌렁 누워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보는 일, 질화로에 향을 사르고 설경을 바라보며 선(禪)에 대해 얘기하는 일, 초여름 날 집에서 가까운 숲으로 들어가 마음 내키는 대로 이끼를 쓸고 바위에 앉아 보는 일을 예찬하며 선생은 좋은 경치를 꾸밈없는 삶의 중요한 배경으로 여겼습니다.

전원에 사는 사람의 꾸밈없는 이야기는 지금 여기, 날이면 날마다 시간과 돈과 욕망에 쫓기며 사는 우리에게 머나먼 시원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없는 현실은 친구도 책도 경치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각박한 심성을 아프게 합니다. 문을 닫고 해야 할 일, 문을 열고 해야 할 일, 문을 나서서 해야 할 일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사는 일상에 선생의 글줄은 뼈저린 삶의 여백을 강요합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인생이 삭막할수록 ‘마음의 문’을 소중하게 관리하라는 값진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을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추구해야 할 세 가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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