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작고 사소한 것들이 만드는 커다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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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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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미술관 ‘Fragile-여림에 매혹되다’전

거대 담론이 아니라 작은 서사를 다룬 대전시립미술관의 ‘Fragile-여림에 매혹되다’전에서는 섬세하고 내밀한 세계를
표현하는 소박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랑수아즈 페트로비치의 드로잉은 말린 꽃잎과 나뭇잎을 이용해 따스하고 정감 어린
이미지를 선보인 작품이다. 사진 제공 대전시립미술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작은 서사를 다룬 대전시립미술관의 ‘Fragile-여림에 매혹되다’전에서는 섬세하고 내밀한 세계를 표현하는 소박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랑수아즈 페트로비치의 드로잉은 말린 꽃잎과 나뭇잎을 이용해 따스하고 정감 어린 이미지를 선보인 작품이다. 사진 제공 대전시립미술관
생크림 위로 올라간 달팽이를 찍은 프란체스코 젠나리의 사진.
생크림 위로 올라간 달팽이를 찍은 프란체스코 젠나리의 사진.
《‘부서지기(깨지기) 쉬운, 무른, 덧없는. 곧 사라지는, 섬세한.’ 영어사전에서 찾아본 ‘Fragile’의 정의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Fragile-여림에 매혹되다’전. 제목 그대로 거창한 담론이나 눈이 휘둥그레질 볼거리는 없다. 작품의 형식, 표현 수단과 방법이 소박하고 단순한데 아름답고 우렁찬 울림이 있다.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와 소소한 기억이 녹아든 작은 서사의 속삭임이 대하소설과 다른 서정시의 매력에 빗댈 만하다.》

‘꽃잎 날개 단 신사’ 드로잉
생크림 위에 앉은 달팽이 사진

스러져 가는 존재에 눈길 주되
개인의 고립 아닌 연대-공감 강조


전시는 프랑스 생테티엔 미술관 로랑 에기 관장이 기획하고 대전시립미술관과 로마 웅게리아 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행사다. 프랑스 이탈리아 아일랜드 카메룬 한국 등 20개국 작가 50여 명의 200점이 로마, 생테티엔, 대전을 순회 중이다. 거대 서사에서 벗어나 ‘개인’과 ‘감정’에 무게중심을 둔 작품들은 반(反)기념비적이다. “소규모 공동체와 작은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경험에 내밀하고 직접적으로 다가서려는” 기획의도에 충실하다. 작고 사소한 것이 만드는 경이로운 세계에 빠져들 기회다. 3월 21일까지. 042-602-3200

○ 일상과 작은 서사의 소중함

벽면에 흐릿하게 찍은 물체들의 사진이 빼곡하다. 작가의 상상 속 이미지를 회반죽으로 만들고 사진으로 촬영한 뒤 액자에 소중하게 보관한 작품이다. 52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빅 무니스의 ‘Individuals 2004-2006’. 시간이 흐르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은 더 소중하고, 평범한 존재도 정성스러운 손길로 다뤄야 함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신중함’ ‘겸허함‘ ‘단순함’ 등 소주제 아래 꾸민 전시에는 섬세하고 시적인 작품이 많다. 프랑수아즈 페트로비치의 말린 꽃잎과 나뭇잎을 활용한 드로잉 14점은 감미롭다. 꽃잎 날개를 단 신사와 머리에 나뭇잎을 단 소년 등의 이미지가 유쾌한 재미를 선사한다. 종이의 구겨진 선을 따라 서정적 풍경을 그린 마시모 바르톨리니, 전시 준비 과정과 개막 풍경 등을 스케치해 곳곳에 붙인 마리우시 타르카비안도 인상적이다.

전 지구적으로 같은 상표의 햄버거를 먹고,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는다. 하나의 아이디어, 하나의 시스템이 뿌리내리는 세상에 작가들은 추억과 일상의 힘으로 저항한다. 지진으로 무너진 일본의 집과 베를린의 작업실 풍경을 겹친 다케무라 게이, 대학 시절의 단골 카페 풍경을 재현한 권인숙 등. 내밀한 체험이 스며든 작업은 ‘전체주의적 균질화’란 물결에 개인의 삶이 휩쓸려선 안 된다는 성찰을 유도한다.

이 밖에 생크림 위에 올라앉은 달팽이 사진의 프란체스코 젠나리, 사막의 달과 동물을 몽환적 영상으로 선보인 사와 하라키, 실을 감은 조약돌이 서로 소통하는 설치작업의 한명옥, 먹을 내뿜어 소우주를 창조한 롤랑 플렉스네, 작가 자신이 복수의 정체성을 연기한 비디오 작업을 내놓은 테사 마논 덴 아윌. 사진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작업에 무궁한 이야기가 있다. 자극적인 현대미술과의 기 싸움에 질린 관객이라면 교감의 폭이 더욱 클 것 같다.

○ 타인에 대한 연대와 공감


소소한 순간, 스러지는 존재를 주목한 전시는 ‘개인의 고립’을 예찬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연대, 공감의 정신을 궁극적 메시지로 내민다. “타인을 만나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며, 딱딱하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경계를 무너뜨리고, 타자에 대한 연대감과 공감을 발휘하는 이러한 유연성은 열린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때 예술선언에 나타나는 연약함은 그 시적인 효율성으로 ‘작은 이야기들’을 새로운 위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로랑 에기)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타인의 내밀한 감정과 추억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다 다르다, 그래서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곱씹게 한다.

대전=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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