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신종환]1500년 전 대가야의 순장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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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도읍지였던 경북 고령에는 1977년 발굴된 대가야 왕릉을 실물 그대로 재현한 왕릉전시관이 있다. 해마다 3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데 관람하기 전에 임신부나 심신 허약자에게 각별히 주의를 당부한다.

무덤 속에 들어가면 으스스한 조명에 노출된 해골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생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10세 정도의 여자아이 둘이 한 무덤에 나란히 묻히기도 했고, 또 다른 곳에는 30대 아빠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덟 살 난 딸을 품에 안고 1500년이 지나도록 손을 놓지 않고 같이 누워 있다. 딸은 젖니를 밀어내고 막 나오려는 영구치가 잇몸에 그대로 박혀 있다. 이쯤에서 어떤 아이들은 울먹이기도 하고 화난 듯이 따져 묻는다. “도대체 순장이 뭔가요?” “왜 그렇게 했어요?”

1500여 년 전 가야 고분 속의 소녀 유골이 최근에 첨단 기술로 복원되어 생전 모습이 공개되면서 순장에 대한 관심이 부쩍 일고 있다. 순장은 고대사회에서 왕이나 그에 버금갈 정도로 신분이 높은 권력자가 죽었을 때 생전에 그가 거느리던 사람이나 동물을 함께 묻는 행위를 말한다. 사람을 죽여서 묻기도 했지만 산 채로 생매장하기도 했다. 스스로 따라 죽는 자진(自盡)도 있었다. 순장 풍속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의 뿌리 깊은 장례 풍속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는데 아프리카 북단의 이집트에서뿐만 아니라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문명에서도 확인된다.

동서양 고대사회의 장례풍습

중국에서 순장은 용산문화기에 출현하여 은주(殷周) 시대에 전성기를 맞는데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100∼200명이 순장됐다.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면 순장묘가 거의 사라진다. 이 시기에 공자는 순장뿐만 아니라 사람 모양의 토용을 무덤에 묻는 것까지 불인(不仁)하다고 했다. 가깝게는 청나라까지 이어져 황제가 죽으면 수십 명의 후궁이 따라 죽어야 했다. 중국 고대에는 목이 잘려 나간 몸통만 매장하거나 머리만 따로 모아서 묻는, 이른바 주인공을 위한 제사에 사용된 제물로서의 순장이 있었고, 주인공이 생시에 거느리던 신하나 처첩 시종 시위 등 측근이 같이 죽어 묻히는 순장도 있었다.

문헌 기록으로 본다면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회에도 순장이 있었다. 부여의 경우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게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때는 동천왕이 죽자 신하들이 따라 죽었다. 또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이 남녀 각 5인을 순장하던 관행을 금지한 기록이 있어 순장이 제도화됐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국내 고대의 순장은 영남 지방에 국한된다. 특히 가야 지역의 왕릉급 고분에서는 많은 순장 사례가 확인된다. 하나의 봉분 안 주인공과 같은 공간에 묻히거나 별도의 순장곽에 묻혔다. 대가야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령 지산동 44호분에는 32개의 순장곽에 36명이 넘게 순장돼 국내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고대의 순장 풍속은 어떻게 시작됐고 당시의 사회 경제적 배경은 어떠했을까? 순장의 사상적 배경은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정령(精靈)사상에 기초한다. 사람은 죽더라도 혼백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관념도 있었다. 또 인간은 사후(死後)세계가 있어 현재의 삶이 끝나면 곧 내세(來世)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사후세계에서도 현재와 같이 물질생활을 계속한다고 믿는 데서 순장이 이뤄졌다. 순장을 당하는 사람도 저항 없이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순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은 신분적 격차, 즉 주인공에 대한 종속성이 인정돼야 하므로 계급이 발생하고 신분계층이 분명히 분화된 고대사회에서 성행했다. 고대사회의 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순장의 규모를 통해 권력을 과시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과 지배라는 단어가 순장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인 셈이다.

첨단기술로 복원된 가야소녀

순장 풍속은 왜 사라졌을까? 경제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면서 막대한 재화와 노동력을 땅속에 묻어 버리는 일은 여러 가지로 이익에 반한다고 여기게 돼서다. 또 사회 윤리의식의 진보에 따라 인륜적 인식의 전환이 일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 대신 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동물 모양의 토우를 넣고 철제품도 실물 대신 미니어처를 만들어 넣는 이른바 박장(薄葬)이 나타난다.

최첨단 기술로 복원된 열여섯 살의 가야 소녀를 두고 ‘작은 얼굴에 긴 목을 가진 팔등신 미인’, ‘군살 없이 탄탄한 아름다운 몸매’라는 식의 설명은 별 의미 없다. 중요한 점은 순장에 대한 당시 사람의 관념과 그 속에 내재한 정신세계이다.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상징의례와 의식체계가 있었을 것이다. 고고학 자료의 한계라 할 수 있는 불가시(不可視)의 정신세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신종환 대가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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