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과속스캔들-쌍화점 환상깨기

  • 입력 2009년 1월 13일 02시 55분


《극장가에 다시 한국영화 돌풍이 불고 있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차태현 박보영 주연의 영화 ‘과속스캔들’이 개봉 32일 만에 500만 관객을 넘어서는 ‘대박’을 터뜨렸고,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가 출연한 사극 영화 ‘쌍화점’은 2주 연속 국내 흥행 1위를 차지하며 개봉 11일 만에 200만 관객을 끌어들이는 기염을 토했다. 두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하다. ‘과속스캔들’은 “너무 재밌다”는 것이고, ‘쌍화점’은 “최선을 다해 벗은 배우들의 모습이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란 반응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흥행한 이유는 알고 보면 한 가지다. 이들 영화는 모두 관객에게 ‘완벽한 환상’을 선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때론 현실을 인용하고 빼닮기도 하지만, 때론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을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늘 나는 두 영화가 만든 허무한 환상을 사정없이 깨려고 한다. 이들 영화를 진정 감명 깊게 보았다는 한 의식 있는 여대생과 논쟁을 벌였다.

기자=‘과속스캔들’이 초등학교 고학년도 볼 수 있는 ‘12세 이상 관람가’란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랐네. 세상이 미친 건 아닐까.

여대생=아니, 왜요?

기자=영화내용을 냉정하게 살펴볼까. 잘나가는 라디오 DJ(차태현)가 과거 중학교 3학년 때 다섯 살 연상의 옆집누나와 ‘사고’를 쳐서 덜컥 임신을 시켰고, 이렇게 태어난 딸(박보영)이 20여 년 만에 아빠를 찾아온다는 내용 아닌가.

여대생=예. 근데요?

기자=근데 이 딸도 아빠의 ‘과속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고교 1학년 때 남자아이를 낳아 이 여섯 살 아이를 함께 데려온단 얘기 아닌가.

여대생=예. 근데요?

기자=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얘긴가. 아빠는 중학생 때 애를 낳고, 그렇게 태어난 딸은 고등학생 때 애를 낳는다니…. 이런 영화를 두고 일부 평론가들은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따스한 가족애를 느끼게 하는 영화”란 평을 했던데…. 놀랄 지경이네. 이처럼 자극적이고 막 나가는 스토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겉으론 ‘쿨’한 척하면서 속으론 위험천만한 주장을 담고 있는 이런 영화야말로 청소년에게 임신과 출산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여대생=아, 정말 영화 전문기자 맞으신가요? ‘영화는 영화일 뿐’이란 얘길 모르실 리는 없을 테고…. 이 영화의 포인트는 분열되어 있던 가족이 다시 따스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어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바라보는 꼴이군요.

기자=‘조기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는 유전적으로도 뛰어나다’는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이 영화의 설정도 큰일이라고 생각하네. 차태현이 중학생 때 낳은 딸은 어찌하여 그리 귀엽고 예쁘고 노래까지 기가 막히게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 딸이 고등학생 때 낳은 아들은 또 어찌하여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천재적으로 건반을 쳐대는 음악 신동이란 말인가.

여대생=아유, 설마 영화를 본 청소년들이 ‘아, 나도 반드시 중고교생 때 조기임신을 하여 훌륭한 2세를 생산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세울까요? 관객이 잠시 고달픈 현실을 잊고 환상에 빠져 즐기는 게 죈가요?

기자=큰 죄네. ‘과속스캔들’의 인물설정이 지금과 달리 현실적이었다면 흥행 대박이 났을까? 만약 차태현을 찾아온 딸이 노래도 지지리 못하고 얼굴도 지지리 못생겼고 게다가 면도칼 씹어대는 ‘일진회’ 멤버였다면, 그래서 아빠를 만나자마자 “아빠, 잘나가는 인생 끝장내고 싶지 않으면 1000만 원 내놓는 게 좋을걸?”이라고 협박하는 스타일이라면, 차태현이 영화에서처럼 딸을 애틋하게 여겼을까? 딸의 여섯 살짜리 아이도 콧물이나 질질 흘리고 껌이나 찍찍 씹고 애들이나 패는 문제아였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가족애가 싹틀 수 있었을까? 현실은 아마 여기에 더 가깝지 않을까?

여대생=그렇게 따진다면, 우린 어떤 영화도 꿈을 갖고 볼 수 없을 거예요. ‘쌍화점’을 볼까요? 여기엔 고려시대의 왕(주진모)과 그 호위무사(조인성)의 동성애가 그려져요. 그런데 만약 왕과 호위무사 역으로 각각 배우 송강호와 유해진이 나왔다면, 두 사람이 침대에서 나누는 진한 베드신도 지금처럼 아름답고 흥분됐을까요? 동성애자를 꼭 미남자들로 그리는 것도 영화적 환상이잖아요?

기자=주진모와 조인성의 베드신은 아름답지도 흥분되지도 않았네. 그저 토할 뻔했네.

여대생=무척 마초이시군요. 그럼 송지효를 생각해 보지요. 당시 원나라에서 정략결혼을 위해 고려로 보낸 여성인데요. 만약 아름다운 송지효와 달리, 덧니도 있고 눈은 단춧구멍만 하고 들창코에다가 키는 150cm에 얼굴 가득 주근깨가 있고 엄청난 똥배와 절벽가슴을 가진 여자라면 어땠을까요?

기자=소가죽 롱부츠를 신으면 허벅지 끝까지 올라오는 그런 여성 말인가?

여대생=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영화란 기본적으로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매체란 뜻이죠. 관객이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일탈과 판타지를 마음껏 상상하도록 만듦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정화) 효과를 내는 것이죠.

기자=난 ‘쌍화점’이 오히려 현실의 중요한 부분을 일깨웠다고 생각하네.

여대생=예?

기자=사랑은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시작된다는 진리 말일세. 조인성과 송지효도 처음엔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였건만, 왕의 지엄한 명령으로 ‘강제 합방’을 하다 보니 어느새 사랑의 불꽃을 피우지 않았는가? 인간은 제 아무리 이성적 존재라 할지라도 ‘사랑’이란 그럴듯한 단어로 자신의 번식욕구를 위장하는 애욕의 동물일 뿐이란 얘기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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