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평양에 간 李종석 장관에게

  • 입력 2006년 4월 22일 03시 03분


코멘트
이 장관, 남북 장관급회담 수석대표로 평양에 갔지만 마음은 무겁겠습니다. 6자회담에서 납북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조급해 하지는 마십시오. 성과에 급급하면 무리수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6자회담만 해도 북-미가 금융 제재로 첨예하게 맞서 있는 상황에서 북이 선뜻 응하겠습니까. 억지로 회담장에 나오게 하려다간 또 무슨 반대급부를 줘야 될지 모릅니다. 납북자 문제는 더 걱정입니다. 송환을 위해 북에 ‘과감한 경제 지원 방안’까지 제시할 것이라고 했는데 효과가 있을까요.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납북자는 485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다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 540여 명을 합치면 송환 대상은 1000명이 조금 넘습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북에서 이미 가정을 꾸렸다는 것입니다. 모두 아내도 있고 자식도 여럿 두었겠지요. 데려오더라도 이들 가족까지 다 데려오지 않으면 북에 또 이산가족을 남기게 됩니다. 날벼락 같은 생이별에 흐느낄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 또는 아버지가 떠난 뒤 그들이 북한 당국의 감시 속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들인들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당사자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납북자 문제는 경위가 어떠했든 본인의 의사와 그가 처한 환경부터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이 남에 있는 가족들이겠지요. 납치 범죄를 저지른 북에 보상할 수 있느냐, 남북관계나 북-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 따위는 잊읍시다. 인륜(人倫) 앞에 이런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몇 명이나 데려올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생사 확인 후 남한의 가족들과의 개별 면담을 통해 귀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귀환하고 싶지만 송환 협상이 실패할 경우 받게 될 불이익이 두려워 안 가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까지 다 포함해서 구체적인 숫자를 파악하는 일이 먼저일 것입니다.

지난(至難)한 일입니다. 납북자나 국군포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북이 순순히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리 없기 때문입니다. 납북자를 ‘전쟁 중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에만 5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장관이 어느 날 갑자기 ‘과감한 경제 지원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납북자와 국군포로가 몇 명이나 생존해 있는지, 이 중 몇 명이나 가겠다고 나설지, 가족들과 함께 데려올 것인지, 아무런 기초 작업도 안 된 상태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작업이 이뤄질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불쑥 ‘경제 지원’부터 제안한 것입니다. 이 장관은 ‘기초 작업까지 일괄적으로 하기 위해 통 크게 던진 것’이라고 할지 모르나 북이 안 받을 경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데 북이 듣지 않았다’고 말할 생각은 말아 주십시오. 북한전문가라는 이 장관이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제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꾸 ‘북이 받으면 좋고 안 받으면 말고’ 식의 전형적인 한건주의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자존심 강한 북의 의중을 떠보지도 않은 채 이렇게 공개적으로 요란을 떨겠습니까.

이 장관, 일본 정부의 김영남 씨 실체 확인에 주눅 들 필요 없습니다. ‘3년 동안 이 정권의 대북정책을 주무르면서 뭐 하나 이룬 게 없다’는 말이 들리더라도 개의치 마십시오. 남북관계가 어디 하루아침에 바뀝니까.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풀어 가면 됩니다.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존재 인정과 생사 확인을 1차 목표로 삼고 북과 협상을 시작하십시오. 비공개 협상이 성공할 확률은 더 높을 것입니다. 북이 생사 확인 비용을 요구하면 주겠다고 하십시오. 그 정도를 못 주겠습니까. 그런 다음 남쪽 가족과의 상봉부터 늘려 갑시다. 여기까지만 하십시오. 그 정도만 해도 이 정권에선 정말 큰일 하는 것입니다. ‘과감한 경제 지원’은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생각할 문제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다음 정권의 몫이겠지요.

이 장관, 모쪼록 회담 잘하고 돌아오기를 빕니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